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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탕자인가?
2014.09.2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중략)…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누가복음 15장 11∼32절

 

교회 내 정의는 정죄와 심판 아닌 용서와 사랑
남을 용서하는 마음이 기적이고 가장 귀한 것
우리를 사랑으로 품으시는 주님만 의지해야


 부요한 농군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말도 순종 잘하고 훌륭한 아들들이었으나 나이 먹어서 장성하니 이제는 아들들의 성품이 뚜렷이 드러났습니다. 첫째 아들은 착하고, 부지런하고 열심히 아버지의 일을 돕는데 둘째 아들은 시간만 있으면 나가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며 아버지 속을 썩였습니다. 아무리 타일러도 듣지를 않았습니다. 그 삐뚤어진 마음을 고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둘째가 아버지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는 기왕 세상 뜰 것 아닙니까? 세상 뜨면 재산은 아버지가 가지고 못가시니 미리 나누어 주십시오. 내게 속한 분깃을 내게 주십시오” 매일같이 재산을 나눠달라고 간청을 했습니다. 이에 견디지 못한 아버지가 재산을 반쪽씩 나누어서 맏아들과 둘째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그것을 가지고 이방나라로 떠나 버렸습니다. 돈도 있고 젊으니 친구들이 얼마나 따르는지 영웅 행세를 했습니다. 여자들도 많이 따랐습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해 돈은 점점 떨어져 바닥이 나 버렸습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그 도시에 기근이 다가왔습니다. 이제는 가진 돈도 없고, 맞아주는 친구들도 없었습니다.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 위해 가장 천한 직업인 돼지 치는 일이라도 해야만 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훔쳐 먹다 주인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습니다. 너무나 배가 고프고 고통스러워지자 고향생각이 나고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우리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든지 있는데 나는 여기에서 주려 죽는구나’ 생활에 어려움이 다가오니까 깨달아지고 회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젊은이가 깨어졌습니다. ‘내가 잘못했다. 아버지 집을 떠나는 것은 잘못이었구나. 지금이라도 아버지에게 돌아가면 아버지가 나를 받아 주실까? 내가 고약한 짓을 했으니 받아주시지 않을 거야. 그러나 아들로 취급을 하지 않고 품꾼의 하나로 봐달라고 가면 아버지가 봐주실지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로 작정했습니다. 남루한 옷, 맨발에, 머리는 산발이 되고, 얼굴은 야위어서 피골이 상접한 몰골로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이 집을 떠난 후에 하루도 쉬지 않고 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돌아오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멀리서 아들과 같은 사람이 터덜터덜 걸어오는 모습을 보며 아버지는 아들임을 확신하고 아들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아들아, 왜 집을 떠나서 살다가 이 모양이 되어 오느냐!” 이 아들은 아버지에게 회개할 기회를 얻으려고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나이다”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시끄럽다! 제일 좋은 옷을 갖다 입혀라. 신발을 신겨라. 가락지를 끼워라. 가장 살찐 송아지를 잡아라.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잃었다가 얻었으니 먹고 즐기자” 아들이 마음속으로 준비한 회개의 말을 다하기도 전에 아버지는 아들을 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다시 고백합니다. “나는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을 자격이 없으니 종들 중에 하나로 봐 주시옵소서” 그러나 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들을 끌어안아 집으로 들입니다.

 그때에 맏아들이 밭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집에 잔치가 벌어지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래서 종을 불러서 물었습니다. 그러자 종이 대답합니다. “당신의 동생이 몸 성하게 집에 돌아온 것을 아버지가 기뻐해서 큰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뭐? 이 놈의 집안 이제는 거꾸로 돌아가는구나” 큰 아들은 몹시 화가났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와서 큰아들에게 “너의 동생이 돌아왔으니 우리 함께 먹고 즐기자!”라고 말하자 큰아들은 소리쳤습니다. “아버지, 동생이 돌아왔다구요? 저 놈 아버지 재산을 가지고 가서 방탕하게 다 탕진하고 이제는 병들어서 돌아왔는데 아버지가 왜 그를 맞아주십니까? 벌을 주어야 마땅하지요” 그러자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얘야, 그래도 네 동생 아니냐.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잃었다가 찾지 않았느냐.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큰 아들이 말합니다. “나는 기뻐하지 못합니다. 아버지도 참 이상합니다. 저렇게 나쁜 놈을 아버지는 용서하고 사랑하고 받아들이신다니 집안에 질서가 서겠습니까? 저런 놈이 집안에 있으면 나는 이 집안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아버지가 나에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안주더니 살찐 송아지를 잡으셨더군요” “아들아 너는 나하고 같이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고 염소 새끼 아니라 황소라도 네가 잡아먹고 싶으면 잡아먹으면 그뿐 아니냐 너의 동생을 정죄하지 말고 들어오너라” 그러나 큰아들은 “나는 안들어갑니다. 못들어갑니다”하며 끝까지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큰 아들은 율법으로 돌아온 동생을 정죄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오직 은혜를 가지고 자식을 대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습니다. 죄를 다 덮어버리고, 용서하고 사랑으로 받아들입니다. 용서와 사랑 그리고 정죄와 심판 중에 어느 것을 정의라고 생각합니까? 성경은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이 정의가 아니라 교회의 정의, 하나님의 정의는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 육신적인 사람, 둘째 아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이 삼위일체인 것처럼 영의 나와 혼의 나와 육의 내가 삼위일체로 되어 있습니다. 육의 나는 육신을 좇는데, 이 둘째 아들은 육신의 나에 잡혀서 혼도 육신의 노예가 되고, 영도 육신의 노예가 되어서 세상 가운데 끌려 다녔던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의 노예가 되면 영도 혼도 끌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은 육신의 일에 대해 말합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처음 창조 되었을 때 사람의 육은 부패하지 않았고 혼과 영을 담고 살아가야 하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타락하고 죄가 들어오자 부패하고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게 된 것입니다. 육신적인 자아가 혼적 자아와 영적 자아를 끌고 갈 때 그 사람은 꿈도 삶의 목표도 없는 부패한 인생이 되어 희망조차 없는 인생이 되어 버리고 말며, 그 결과로 인생에 기근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의 삶이 그랬습니다. 그는 자기 인생이 누더기 같이 썩었다는 것을 가장 비천한 환경에서 돼지를 치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달은 둘째 아들은 눈물로 회개하기 시작합니다. 누가복음 15장 17절에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통회하고, 자복합니다. 18∼19절에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하면서 아버지께로 그 발길을 돌립니다.

 

 2. 혼적인 사람, 맏아들

 그러나 맏아들은 자기 동생이 그렇게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 아주 못마땅했습니다. 혼적인 사람 맏아들은 무엇이든지 이성으로 생각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동생은 율법으로 죄를 지은 사람이고 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아주 이성적이며, 혼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가진 재산을 모조리 탕진한 동생에 대해서 분노를 느꼈고, 그 동생을 무조건 다시 받아주는 아버지에 대해서 반항했습니다. 아버지의 비이성적이고 비율법적인 태도에 분노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돌아온 동생을 무조건 용서하는 아버지도 잘못되었고, 방탕하여 재산을 탕진한 동생은 더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거지가 되어 돌아온 동생에게 사정없는 정죄와 심판을 내렸고, 동생의 허다한 허물을 덮고 사랑을 베푸는 아버지에게 분노가 가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 앞에서 누가 옳습니까? 정의란 것은 독불장군처럼 나만 잘사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정죄하거나 심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10∼14)고 하신 것처럼 사람이 아무리 옳게 살아도 자기를 높이며 자랑하면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이 용서받고 사랑을 받아서 은총을 입고, 구원을 받은 사실을 깨달아 똑같이 죄짓고 불의하고 추악한 사람을 볼 때 용서하고 사랑해야 자신의 의로움이 인정되는 것입니다.

 맏아들은 자기 동생이 죄인이요, 탕자요, 사기꾼이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계시는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죄인과 탕자와 사기꾼을 받아들이는 하늘 아버지의 천국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28∼30절입니다.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사랑과 용서를 원하십니다. 우리 아버지는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고,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와서 회개하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친히 죄인 있는 곳으로 오신 놀라운 사건입니다. 의원이 필요한 곳은 병자가 있는 곳이 아닙니까?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죄인 있는 곳에 가셔서 죄인을 구원하시고, 병든자에게 찾아 가셔서 고치시고, 배고픈 자에게 찾아 가셔서 먹이시고, 슬퍼 우는 자에게 가셔서 함께 울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큰 사랑과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영혼이 잘못된 죄인들이 득실거리는 곳에 하나님이 찾아가서 죄인들을 회개시키시고, 용서하시고, 구원시키는 역사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잘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생활이 막장이 되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이 있는 곳에 들어가셔서 그 사람들을 축복하고 건져 주십니다. 병들어 아파 괴로워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기도를 하시고 축복해 주시고 고쳐주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있는 곳에 계시며, 가난한 사람이 있는 곳에 계시며, 병든자와 같이 계십니다. 우리의 가운데 죄 짓고 방탕한 사람,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이 제일 먼저 구원받을 대상입니다.

 

 3. 영적인 사람, 아버지 
 
 본문의 맏아들은 혼의 아들이고, 둘째 아들은 육의 아들이고, 아버지는 영적인 아버지입니다. 용서와 사랑으로 탕자를 품에 품는 것은 영적인 아버지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20절에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라고 한 것처럼 영적인 아버지는 육체적인 자식이 회개하고 돌아오니 끌어안아서 그를 품어주시는 것입니다. 영적인 아버지는 죄인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아버지이기 때문에 절대로 우리가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버림을 받아야 마땅함에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베드로가 “형제가 내게 범죄하면 몇 번이나 용서할까요? 일곱 번 용서할까요?”라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범죄하고 네게 오면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해 줘라”고 대답해주었습니다.(마 18:22) 하나님은 사랑과 은혜가 넘치는 하나님이십니다. 베드로전서 4장 8절은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습니다. 허다한 죄를 덮어서 용서하고 바르게 만들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사랑으로 완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완성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3장 10절은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바울선생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자기가 되었지 율법의 행위로써 자기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12∼16절에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의 죄가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많습니다. 이 세상에 온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 부르심을 향해서 나아가는데 진흙에 뒹굴기도 하고, 도랑에 빠지기도 하고, 티끌에 먼지가 묻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흙에 빠졌다고 그곳에 주저앉아서는 안됩니다. 진흙에 뒹굴면서도 먼지투성이가 되면서도 도랑에 빠지고 비틀거리면서도 하나님께로 나가는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 주시고, 의로운 옷을 입혀 주시고, 가락지를 끼워주시고, 신발을 신겨주시고, 하나님의 은혜의 송아지를 잡아서 배부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아버지의 자녀가 되었음을 우리는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4. 사랑의 역사

 사랑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맛있게 먹고 즐기게 하는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값 주고 산 우리를 위해 제일 좋은 옷을 입히시고, 아들 된 증거로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며, 아버지가 예비한 신발을 신겨주십니다. 이 모든 것은 물질과 환경을 상속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보시고 매우 좋아하시며, 당신의 형상과 모양대로 닮은 우리와 함께 영원히 즐기면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면 너무나 행복해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는 우리가 필요하고, 우리에게 역시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깊이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없으면 정죄와 심판이 난무하고 죽이고 죽는 비극이 세상에 가득할 것입니다. 교회 내의 정의는 정죄와 심판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십계명을 두 가지로 나눴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4절은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라고 합니다. 율법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율법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완성한 것입니다.

 로마서 13장 8절, 10절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우리의 인물이 잘났기 때문도,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스바냐 3장 17절은 “너의 하나님 야훼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외롭고 괴롭고 버림받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바라보며, 무엇이든 응답하시고, 채워주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가 우리의 삶에 임할 때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용서가 우리 안에 체험되어 같은 용서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게 되는 것이다. 죄의 용서는 당신과 내 안에 나타나는 가장 위대한 초자연적인 기적이다” 이와같이 오스왈드 챔버스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용서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남에게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남을 용서하는 마음이 기적이고, 그것이 가장 귀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용서를 경험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모든 상황 가운데 있을 지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와 사랑은 위대한 기적을 만듭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오면 용서로 늘 받아주시지 결코 어떤 조건도 붙이지 않으십니다. 탕자와 같은 우리들을 사랑으로 품에 안아 주시는 용서와 사랑의 주님을 의지하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기적을 행하시는 야훼 하나님! 탕자처럼 세상 가운데 버려진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며, 정죄하지 않으시고, 용서와 사랑으로 품에 안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도 세상에서 용서와 사랑의 소중한 은혜를 나누며 살아가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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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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