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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2014.08.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 5장 1절

 

인간은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절망적 존재
깨어지고 낮아져 주님 섬기고 이웃과 화목하며
입술로 죄와 질병과 저주 물리치면 기적 일어나


 “나는 누구인가?” 우리가 평안할 때는 이런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심히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거나 살고 싶은 욕망이 사라질 때 “나는 누구이며, 왜 사는 걸까?”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모든 인생은 절망으로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죄책과 패배감에 사로잡힌 존재이고 허무와 무의미를 안고 살아가는 존재이며 죽음과 허무에 처해 있는 절망적 존재입니다.

 인생의 가장 근원적인 질문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질문으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부터 현대의 사상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가 던졌던 질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인간은 그 누구도 이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인간들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정체성이 불분명하면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알 때 행복하고 안정된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1. 나는 어떻게 이 땅에 지으심을 받았나?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우리는 “나는 어떻게 이 땅에 지으심을 받았나?”라는 질문에 대해 근원적인 대답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아 하나님의 품에서 이 땅에 태어난 존재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기록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인간은 원생동물인 아메바에서 진화돼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인간은 하나님의 손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라고 생각하는 것을 비교해 보십시오. 마치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가치가 다르지 않습니까? 아메바에서 진화된 사람은 그 조상이 벌레나 기껏해야 원숭이 같은 유인원입니다. 그러니 무슨 가치나 칭찬거리가 있겠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아무리 어렵게 살아도 ‘나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이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말하면 스스로 자신을 돌아볼 때 존귀와 가치를 느끼고 지니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음을 받아 하나님을 섬기고 감사하기 위해 사는 존재입니다. 이사야 43장 7절과 21절은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지으신 것은 자신의 곁에 두고 함께 대화하시고 하나님을 찬송케 하려고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무엇을 하고 살아야 되는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지으신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찬양케 하기 위해 지으신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매일같이 하나님을 감사하고 찬양하면 지음 받은 목적과 의미에 충실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실 때 자신을 대신해 땅을 정복하고 만물을 다스리게 하기 위해 지으셨습니다. 창세기 1장 28절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이유는 노예처럼 압박을 당하고 병들고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리고 소외된 삶을 살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땅을 정복하고 만물을 다스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곁에 있고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우리에게 이뤄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아버지시고 우리의 보호자시며 우리가 섬겨야 할 유일한 목적이며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다 사해 주시고 우리에게 삶의 가치와 의미를 주신 것은 온전히 하나님만 섬기며 사망 권세를 이기고 영생하게 만들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제 하나님 안에서 우리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2. 서로 의지하도록 지으심을 받음
 
 사람은 아무리 똑똑해도 혼자서 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서로 의지하고 살도록 지으셨습니다. 창세기 2장 18절로 22절은 “야훼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 야훼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아내인 하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너희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내가 같이 있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두세 사람’이 함께 있을 때 같이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또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도 ‘너’가 아니라 ‘너희’라고 말씀하시며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함께 있으라고 했는데 따로따로 지냈나 봅니다. 성경에 보면 하와가 뱀의 형상으로 나타난 사탄하고 이야기할 때 아담은 어디로 갔는지 하와와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함께 있었다면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아담이 “하와!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께서 절대로 먹지 말라고 하셨어요. 먹으면 진정으로 죽게 됩니다”라고 단호히 말해 주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벌써 부부싸움이라도 하였는지 따로 떨어져 있습니다. 결국 하와는 뱀의 꼬임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었고 남편인 아담에게도 권하여 마침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해 타락하고야 말았습니다.

 타락의 결과는 서로 손가락질하는 책임전가로 이어졌습니다. “왜 선악과를 먹었느냐?”는 하나님의 책망에 아담은 “하나님께서 지어주신 여자가 제게 주므로 먹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곧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탓이며 하와의 탓입니다. 저는 책임이 없습니다”라는 의미와 같습니다. 하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뱀이 꾀므로 먹었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나는 책임이 없습니다. 내 탓이 아닙니다”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때로부터 시작해서 오늘날까지 사람들은 어떤 잘못에 대해 “내 탓이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모인 우리들도 무슨 문제가 생기면 누구도 “내 탓이오”라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당신 탓이야! 당신 때문에 다 잘못되었어!”라고 말하고 아내도 남편에게 “무슨 소리에요! 다 당신 탓이라구요”하며 서로 악다구니를 하며 다툽니다. 또 자식은 부모 탓이라고 하고 부모는 자식 탓이라고 합니다. 사장은 직원 탓이라고 하고 직원은 사장 탓이라고 합니다. 여당은 야당 때문이라고 하고 야당은 여당 때문이라고 합니다. 참 난감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서로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함께 살라고 하셨는데 서로 남의 탓만 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바로 우리 스스로 먼저 깨어져야 됩니다. 깨어진 사람은 모든 것을 자기 탓이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사람입니다. 깨어짐에는 귀한 은혜가 함께 합니다. 사람은 깨어져야 쓸 만합니다. 깨어지지 않은 사람은 쓸모가 없습니다. 깨어진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고 협동하는 마음이 됩니다. 사랑하고 의지하고 협동하며 사는 것이 혼자서 잘사는 것보다 훨씬 아름답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꾸 우리를 깨뜨리려고 하시는 이유는 온전히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따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깨뜨리시려고 시험하실 때 우리는 주저 없이 깨어져야 합니다. 날마다 회개하고 깨어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앞에 범죄 한 후에 저주를 받았습니다.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겨우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병이 들고 결국에는 죽어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소통이 단절되니 영혼이 파괴되었고 하나님께 쫓겨났으니 범사가 저주를 받아 강건하지 못하고 병들고 고통당하고 괴로워하다가 죽어야 하는 존재로 추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해야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복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어떤 공로로도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는 모두 영원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영원한 용서를 주시고 영원한 성결을 주시고 영원한 치료를 주시고 영원한 천국을 주십니다. 우리가 이 진리를 믿고 따랐으면 마음에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아야 합니다.


 3. 예수님의 대속으로 달라진 나의 배경


 로마서 3장 24절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기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 율법을 행함으로 살지 않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5장 1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기록합니다. 

 성경에 있는 이런 약속의 말씀들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서 날선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쪼갭니다. 하나님 말씀은 살아있습니다. 살아있는 말씀이 우리 몸속에 들어오면 몸속에 들어가서 잘라낼 것은 잘라내고 치료할 것은 치료하고 낫게 할 것은 낫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심신의 질병까지도 다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지난 주간에 저를 찾아온 한 자매님의 간증에 저는 무척 놀랐습니다. 그녀는 위암에 걸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간과 장과 자궁까지 암세포로 가득 차 온몸에 암이 쫙 퍼졌습니다. 병원에서도 치료는 도저히 불가능하고 결국 죽겠지만 조금이라도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떼어 낼만 한 것은 떼어내 보자고만 했답니다. 원래 우리교회 성도가 아니었던 그녀는 TV방송을 통해 매일 저의 설교를 들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제가 “치료를 받으려면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얻었다’는 말씀을 만 번 써보라”고 했었는데 정말로 그녀는 그 말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소리를 내 읽으며 만 번까지는 아니고 한 몇 천 번 정도 썼다고 합니다. 수술날짜가 돼 병원에 가서 다시 엑스레이를 찍어보았더니 난리가 났다고 합니다. 의사들이 “우와! 온 몸과 장기에 퍼졌던 암세포가 거의 줄어들어 보일 듯 말 듯 하네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하면서 말입니다. 스스로도 너무 깜짝 놀랐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힘이 있는 줄을 몰랐다면서 목사님께 와서 안수기도 받고 하나님 능력으로 완벽하게 깨끗이 낫기 위해 왔다고 고백했습니다. 정말 저도 기분이 무척 좋아 안수해 주었습니다.

 우리들도 성경의 말씀들을 살아있는 말씀으로 취급해야 합니다.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말씀이 육신이 돼 이 땅에서 사역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성령을 통해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꾸 외우십시오. 자꾸 외우고 감사로 무장하면 그것은 운동력이 있어서 온몸에 들어와 역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치료와 변화가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저주를 다 청산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주십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말씀합니다. 이전의 낡은 피조물은 죄의 종이요 허물의 종이요 병의 종이요 저주와 가난의 종이요 죽음의 종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공로를 통해 죽고 부활했으므로 이러한 종의 멍에는 이제 완전히 끊어졌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제 우리는 의롭고 거룩한 존재로서 병에서 고침 받고 건강한 복을 받아 아브라함의 복을 누리는 영생복락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로 10절은 새로운 우리의 자화상을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4. 말을 바꾸라


 우리는 말을 바꿔야 합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로운 자화상을 얻고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한 사람이 되었어도 이것을 표현하는 것은 전부 ‘말’입니다. 말을 잘못하면 신앙생활도 헛됩니다. 말을 바꿔야 운명이 달라집니다.

 야고보서 3장 3절에서 5절은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라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커다란 배도 그 방향을 정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작은 키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몸을 붙잡고 방향을 정해주는 키는 바로 ‘혀’입니다. 제멋대로 날뛰는 말들을 순종케 하는 것은 그 입에 묶어놓은 재갈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을 조정하는 재갈은 바로 ‘혀’입니다. 때로 작은 불씨를 잘못 간수하여 큰 불이 나지 않습니까? 이처럼 혀는 잘못 사용하면 온 인생을 불태우는 불길이 됩니다.

 우리의 생각도 말로써 나타나고 꿈도 말로써 나타나고 믿음도 말로써 나타나고 복과 저주도 말로써 나타납니다. 인생에서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천지를 지으실 때 말씀으로 지으셨습니다.
 OECD에 가입된 국가 중에 가장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 바로 우리나라 사람들이랍니다. 그것에 대해 연구한 논문을 보면 미국이나 유럽인들에게 “Are you happy?(행복하십니까?)”라고 물으면 “I’m happy!(행복합니다)”라고 쉽게 대답한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언어구조상 “아임 해피”는 발음하기도 쉽고 감정적으로도 쉬운 느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당신은 행복합니까?”라고 물으면 일단 감정적으로 계면쩍고 어색할 뿐 만 아니라 “행복합니다!”라는 말 자체가 발음하기가 힘든 언어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행복하기를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입술로 말을 해야 합니다. 입술로 말을 하면 그 말이 능력을 나타내고 역사합니다. 다 같이 한번 고백하십시다. “나는 행복합니다!”

 말을 올바르게 하면 굉장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꿈쟁이 요셉도 그 꿈을 말로 자꾸 고백하다 보니 그 꿈이 실제로 이뤄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는 그 말이 우리의 내일을 만들어 갑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강력한 무기는 바로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통해 우리의 환경을 변화시키고 창조하시고 성공하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으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지만 우리 스스로도 맞서 싸워야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그저 가만히 있는데 믿음, 소망, 사랑이 생기고 의, 평강, 희락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와 같은 성령의 열매는 우리 스스로 그 열매들을 맺겠다고 노력하고 애쓸 때 성령께서 도와주셔서 열매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로써 성령과 대화를 해야 됩니다. 신앙생활을 통해 이기고 지는 것은 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가 “죄와 허물을 물리친다”고 계속해서 고백하면 성령께서 그 말을 통해 죄와 허물을 무장해제해 버립니다. “나는 건강하고 튼튼하며 질병을 이겼다”고 계속 말하면 질병도 물러갑니다. “나는 복을 받았다. 가시와 엉겅퀴가 떠나갔다. 저주는 물러갔다. 나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고 형통하다”라고 늘 말하면 그 말이 역사해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처럼 말을 잘 사용하면 운명을 바꾸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이 하나님의 영과 하나되어 3차원의 세계를 다스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지으신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죄로 말미암아 모두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려 절망에 허덕이며 살아왔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죄와 사망과 질병과 허무와 저주에서 해방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보혜사 성령님,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입술을 주장하셔서 용서받고 건강하며 복을 받은 자화상을 회복케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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