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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2014.07.0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23편 4절


빛이신 예수님과 동행하면 모든 어두움 사라져
마귀는 두려움 통해 들어와 도둑질하고 멸망시켜
고난의 밤 찾아올 때 기도와 찬송으로 이겨내야

 우리들은 매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납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예수님 없이 우리는 모두 죄인이고 죄인은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니 어둡고 캄캄한 죽음의 골짜기를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등지고 떠난 사람들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그 빛을 볼 수 없습니다.

 

 1.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체험을 반드시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희망이 없는 좌절의 골짜기를 지나게 하는 체험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깨닫게 해주시고 소망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온전히 빛을 보기 위해서는 어둠을 체험해야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알고 예수님께서 구주되심을 알기 위해서는 어둡고 캄캄한 인생의 밤을 지나봐야 됩니다. 눈물과 고난의 밤을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의 온갖 거짓되고 위선된 빛에 속아 그 빛 아래서 기뻐하지만 그러한 인조 광택은 얼마 있지 않아 다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M. Luther)는 “시련이 없고 모든 것이 순조로울 때가 가장 위험한 때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시련과 고난이 없으면 참 소망되신 하나님을 잊고 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해 어둠에 처하게 되면 참된 빛과 소망인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됩니다.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고 배고픈 사람이 밥을 찾듯이 환난과 고난에 처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게 됩니다. 고난당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얼마나 귀중하고 필요한 분이시라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면 어디든 빛이 있어 어둠이 사라집니다. 죄악의 어둠이 사라지고 허물의 어둠이 사라지고 질병의 어둠이 사라지고 죽음의 어둠이 사라집니다. 어떤 어두움에 갇혀도 예수님과 동행하면 그 어둠은 사라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히 어두움을 이기시고 물리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9장 5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 계시면 우리도 마음에 빛을 모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이 있습니다.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2장 46절은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둠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어두움을 제하는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은 우리의 삶에 어두움을 제하고 희망의 빛을 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제 예수님 안에 거하는 우리에게는 어둠이 없습니다. 주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님 오른편에는 기쁨이 넘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계시는 곳은 어둠이 사라지고 어느 곳이든 빛이 충만합니다. 빛은 소망을 말합니다. 소망이 없는 절망의 인생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면 하나님께서 소망을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소망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33절은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어둡고 캄캄한 고난의 골짜기를 지날 때 하나님을 더욱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신앙을 성장하게 만들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몸의 근육을 만들려면 걸어야 되고 운동을 해야 되는 것처럼 영혼의 근육을 만들려면 시험을 당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앙의 근육이 생기게 하려고 고난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고난을 통하면 믿음이 강해지고 신앙이 견고해집니다. 기도의 권세도 강해져 능력 있게 세상을 이겨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17세기 영국의 신학자 토마스 아담스(Thomas Adams)는 “그대에게 시련을 주는 것은 무엇이나 그대의 유익으로 계산하라”고 말했습니다. 시험이 오거든 그것을 플러스로 계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나가면 고난이 변하여 복이 됩니다.

 

 2.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려면 무엇보다 두려움을 극복해야 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는 마귀가 두려움을 냇물같이 흐르게 합니다. 두려움이 우리의 주위에 늘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두려움을 바라봐서는 안됩니다. 온전히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성경에는 “두려워 말라”라는 말이 365번이나 기록돼 있습니다. 시편 23편 4절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서는 전적으로 예수님만 바라봐야 됩니다. 우리가 직접 두려움과 대면하여 싸워서는 안됩니다. 우리 스스로 싸우려 하면 두려움이 더 강하게 우리를 압박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시고 우리를 통해 두려움을 물리쳐 쫓아버리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에서 몸 찢기고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소중히 여기시기 때문에 생명처럼 귀한 아들을 내놓으신 것입니다. 마귀가 우리를 둘러 진을 쳐 우리가 두려움에 쌓여있을 때 예수님을 바라보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생명처럼 사랑하셔서 품에 품으십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시련이 다가오거든 다른 것 보지 말고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를 쳐다보고 눈을 감고 마음에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를 넓은 팔로 품고 계시는 모습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예수님의 사랑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예수님! 사랑합니다!”라고 입술로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의 능력이 우리 입술을 통해 나타나 어둠과 사망의 두려움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떠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27편 1절은 “야훼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야훼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라고 고백합니다. 또한 요한일서 4장 18절은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 안에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아버리는 것입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다”는 것은 두려움이 있으면 고통이 다가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은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유일한 빛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 빛은 우리에게 의로움과 거룩함을 주시고 심신에 건강과 삶의 축복을 주시며 영원한 소망을 주십니다. 우리는 전에는 어두움이었습니다. 원수 마귀의 손에 잡혀서 시련을 당하고 어두움에 몸부림쳤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주 안에서 빛입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이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의 자녀들이 되었으니 이 세상에서 빛으로 행하며 삶을 통해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을 실천하며 살아야 됩니다.

 누구에게나 두려움은 있습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을 모셨기 때문에 두려움이 사라져 믿음이 들어차고 어둠이 물러갑니다. 로마 제국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밤을 두려워했습니다. 프랑스의 앙리 3세는 고양이를 두려워했습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는 장미꽃을 두려워했습니다. 이처럼 세상을 호령하던 권력가들도 두려워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두려움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두려움을 물리치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예수님으로 충만하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태양 앞에 어두움이 사라지는 것처럼 예수님 앞에 두려움은 모두 사라져 버립니다.

 

 3.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해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두려움이 해를 가져오는데 두려움이 사라지니 해를 받지 않게 됩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있으면 마귀가 그 두려움을 통해 해를 받게 만듭니다. 두려움이 우리를 파멸시키는 극적인 장면을 기록한 성경이 있습니다. 바로 욥기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을 깊이 의지한 사람인데 안타깝게도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의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는 마귀가 가져다주는 그 두려움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재산과 자녀를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재산을 다 잃었는데 양 7000마리가 하늘에서 내린 불을 맞아 다 죽었고 약대 3000마리를 강도들에게 뺏겼으며 소 500겨리를 다 도둑맞았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7명이고 딸이 3명인데 맏아들 집에서 잔치 베풀다가 집이 무너져서 다 압사 당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욥 자신은 갑자기 몸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솟아서 옷을 입지 못하고 진물이 흘러 잿더미 위에서 기왓장으로 몸을 긁었습니다. 그의 부인이 그 장면을 보고 “그래도 하나님을 믿고 온전함을 지키느냐? 이 정신 빠진 영감아!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라! 죽어!”하고 떠나가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세 사람이 멀리에서 욥을 위로하러 와서는 위로는커녕 비난만 하고 공격했습니다. 아마 욥보다 더 비참한 경험을 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은 왜 그런 일들을 당하게 되었을까요? 욥기 3장 25절은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라고 기록합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찾아와서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킵니다. 마귀는 우리를 파멸하기 위해서 반드시 두려움을 먼저 넣어줍니다. 두려움은 마귀가 우리 안에 들어오는 통로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내가 암에 걸리겠지’하며 두려움을 품으면 이미 마귀는 우리 안에 암을 가져다 주려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귀는 두려움을 통해 우리 안에 들어옵니다.

 우리는 마음과 생각을 지켜야 됩니다. 어떤 두려움도 십자가 보혈로 물리치고 대항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꿈을 놓으면 안됩니다. 꿈이 없으면 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으로 나아지는 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 믿음의 빗장을 견고히 해야 합니다.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됩니다. 그 믿음의 빗장으로 두려움이 감히 우리 마음을 열고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입술로 고백하는 선포와 시인을 통해 두려움을 물리쳐야 합니다.

 두려움은 파괴를 가져오지만 평안은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옵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다 보면 마음이 평안해집니다. 그것이 바로 응답의 시작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책임진다는 증거를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두려움에서 건지겠다는 약속의 말씀이 많습니다. 이사야 41장 10절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말씀합니다. 이사야 43장 1절로 3절도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야훼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두려움은 마귀의 사자이고 우리를 파멸케 하는 선동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막는 평안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두려움을 보통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두려움은 아주 악하고 나쁜 마귀의 사자입니다.

 누구에게나 고난의 밤이 찾아옵니다. 어둡고 캄캄한 밤이 왔을 때 절대로 원망이나 불평이나 탄식을 해서는 안됩니다. 원망과 불평을 통해 두려움은 더 큰 불행을 가져옵니다.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을 때 온몸에 피가 철철 흐르고 배고프고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두려움을 이기고 불행을 이기는 비결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간절한 기도와 감사의 찬송입니다. 그들이 감방에서 쇠고랑을 철컥철컥 맞춰가면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들의 찬송을 들으시고 깊이 마음에 감동을 하셔서 온 감옥에 지진이 나고 옥터가 움직여 모든 문이 다 열리고 모든 사람의 매인 쇠고랑이 다 벗어지도록 하셨습니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고난의 밤이 우리에게 다가오거든 간절한 기도와 감사의 찬송을 돌리십시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은혜를 주시는 섭리를 나타내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그런 신기한 기적을 베푸십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도 기도하고 감사하면 하나님은 그 고난과 동등 혹은 그 이상의 축복을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그러므로 고난이 다가올 때 기도하고 감사하며 찬양할 때 모든 묶인 것이 풀어지고 마음의 평안과 축복을 얻게 됩니다.


 4. 예수님은 자유를 주시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 종교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마귀에게 묶여있는 우리에게 해방과 자유를 주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3절은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마귀의 나라에서 건져내서 하나님의 아들 사랑의 나라로 옮겨 그 나라의 시민권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늘나라 시민권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시인한 사람은 마음에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능력을 통해 우리가 마귀의 나라에 속하였을 때 억압된 모든 것을 해방시켜 주십니다. 질병과 고통의 억압, 불안과 공포의 억압, 좌절과 절망의 억압, 미움과 원한의 억압에서 자유를 얻게 하십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기록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종의 멍에를 멘 종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승천 하실 때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나 있는 곳에 너도 함께 있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이천년 동안 우리의 처소를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이 땅에 두신 것은 이 땅에서도 천국을 이루라는 뜻입니다. 먼저 마음에 천국이 이뤄지고 가정과 생활에 천국이 이뤄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마음 천국, 가정 천국, 생활 천국을 이뤄야 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가는 곳마다, 하는 일마다 천국을 이뤄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가장 먼저 천국을 선언하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는 복된 소식을 주고 포로된 자에게는 자유를 주고 눈먼 자는 다시 보게 하고 눌린 자는 해방시켜 주고 주님의 해를 전파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61장 1절에서 3절은 “주 야훼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야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야훼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야훼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빛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소망을 주며 기쁨과 즐거움을 줍니다. 식물들은 햇빛을 받아 그 잎의 엽록소를 통해 탄소동화작용을 일으켜 그것으로 영양분을 만듭니다. 그렇게 영양분을 만들어서 저장해 놓은 것이 열매가 됩니다. 이것을 사람과 각종 동물들이 먹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것은 바로 햇빛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혹은 간접으로 햇빛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실제적으로 빛을 먹고 살고 영적으로도 빛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육적으로든 영적으로든 빛을 먹지 않고는 살지 못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자연을 훼손시켜서 자연이 사막화되면 양식이 없어져서 다 굶어죽게 됩니다. 이처럼 육체적으로는 햇빛을 먹고 살고 영적으로도 빛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먹으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생명의 빛입니다. 이제 우리는 빛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고 하늘에 있는 햇빛을 감사하고 우리 마음에 계신 영혼의 빛인 예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빛을 마음껏 누리며 살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우리 가운데 빛이신 예수님을 보내주심을 감사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바로 빛이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이제 모든 절망과 저주와 고난의 어두움과 두려움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은혜만이 넘치게 됨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악하고 어두운 세력인 마귀의 종이 아닙니다. 온전히 삶 가운데 천국을 누리며 살기를 소망합니다. 빛이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늘 지키시고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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