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중략)…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히브리서 4장 1∼11절
‘노동’ 아닌 ‘쉼’이 주님 주신 인생의 출발지
아담의 불순종과 반역으로 고달픈 인생사 시작
예수를 믿음으로 예비된 새로운 안식 누려야
근래들어 전 세계적으로 일주일에 닷새 일하고 이틀 쉬는 것이 관행이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미국에서는 “나흘만 일하고 사흘은 쉬자”라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는 한 주일에 한 번도 쉬지 않고 늘 일을 했습니다. 그래도 굉장히 살기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일하시고 제 칠일에는 모든 일을 쉬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 인간과 하나님의 안식
성경말씀을 통해서 보면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것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일하시고 이레 째 쉬셨습니다. 제가 처음 교회 목회를 할 때 너무 열정적이 되어서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하니까 나를 따라 다니던 장로님들이 피곤해서 하루는 제게 오더니만 “목사님이 하나님보다 위대하십니까?” 그래서 제가 “내가 왜 하나님보다 위대합니까?”하니 “하나님도 엿새 동안 일하시고 이레째는 쉬셨는데 왜 안쉽니까? 그러니 우리도 못쉬지 않습니까? 하루 쉬십시오” 그 말이 마음속에 늘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도 전지전능 무소부재 하시면서도 엿새 동안 일하시고 이레째는 쉬셨습니다. 창세기 2장 2절로 3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이렇게 물었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아버지, 오늘이 저의 생일날이 아닙니까? 이 생일날 우리 뭐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보고 빙그레 웃으시면서 “아담아, 내가 만물을 다 지어 놓았다. 하늘을 보아라 없는 것 없지? 땅을 보아라. 모자란 것 없지? 그리고 너와 네 아내를 지어 놓았고 이 만물을 다스릴 권한을 주었는데 이날은 내가 모든 일을 완성하고 쉬는 날이므로 너 인생은 휴식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인생이다. 일함으로 시작하는 것이 인간이 아니라 쉬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인생이 이 땅에 지어진 목적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이 땅에 지음을 받은 것은 일하기 위해서 지음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안식하고 쉬기 위해서 지음을 받은 것입니다. 물론 일은 해야 되겠지요. 그러나 엿새 동안 일하고 이레째 쉬는 것이 제일 출발이기 때문에 쉬는 것이 우리 인생에 출발인 것입니다. 쉬고 난 다음 일을 하는 것이지 일하고 난 다음 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 오늘은 나의 안식일이니 내 안식에서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안식일은 굉장히 중요한 날이기 때문에 모세의 율법으로 안식일을 쉬고 그 날에는 하나님을 섬기라고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신명기 5장 12절로 15절에 보면 “네 하나님 야훼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야훼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야훼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야훼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안식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신명기 5장에 보면 너희만 안식을 할 것이 아니라 너희 집에서 부리는 남종이나 여종도 그날은 일 쉬게 하라. 소와 나귀나 짐승들조차도 그 날에는 부려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전적으로 쉬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하나님께 대단히 중요한 날입니다. 십계명을 보면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우상에 절하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안식일을 지키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 관계에 대한 네 가지 계명 중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을 꼭 넣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속에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이 떠나지 아니하고 육신의 질병과 고통이 늘 다가오는 것은 하나님이 명령한 안식일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다 예비해 놓으시고 쉴 때는 쉬라고 하셨습니다.
2. 쓸데없는 일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자신이 다 지어놓으신 세상에서 삶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감사하고 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원래 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사람 것이 아닙니다. 일을 행하시는 것은 야훼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가로채서는 안됩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특권이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신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빼앗아 자기가 하려고 하므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다 지어놓으신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고 감사하고 누리며 살면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만 생각하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또한 디모데전서 6장 17절에는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이방인들이 염려하는 것이고 천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 아시느니라. 우리가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다 예비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만들 필요가 없는 일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했으면 괜찮았을 것인데 불순종하고 반역해서 ‘죄’라는 문제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쓸데없이 일거리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허물의 문제’를 만들어 놓고 그 결과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하니 병들지 않습니까? 흙으로 돌아가기 위한 ‘병의 문제’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 다음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하는 ‘먹고 사는 문제’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죽어서 장례 지내서 흙으로 돌아가는 ‘죽음의 문제’도 만들어 놓았고 거기에 파생되는 교만, 욕심, 탐심,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 두려움, 모든 인생사 문제같은 쓸데없는 것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원래 하나님께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반역하고 불순종하므로 이런 일을 만들어 놓아 세상살이가 이렇게 복잡하고 괴롭고 힘들게 된 것입니다.
영성 신학자 마르바 던은 「안식」이란 그의 책에서 진정한 안식의 의미를 “안식이란 일하는 것을 그칠 뿐만 아니라 마음의 걱정과 근심을 그치는 것이 안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에 걱정 근심을 하고 있으면 안식이 아닙니다. 우리 육신으로 하는 일만 그칠 뿐 아니라 마음의 염려, 근심을 다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안식은 단지 일하던 것을 중단 하는 것뿐만 아니라 염려하는 것까지도 그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쉬지 못하는 것은 언제나 내가 모든 것을 돌보고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인 것입니다. 인간은 인본주의로 살면서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죄와 허물, 병과 저주와 죽음의 문제를 짊어지고 힘에 겨워 허덕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 교만과 오만과 탐심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 일을 빼앗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우리가 대신하려고 하는 교만과 오만을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3. 구주 되신 예수님의 안식
예수님은 아담과 하와를 대신해 오신 인류의 새로운 조상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실패한 인류 조상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빼앗아 자기가 하려고 하다가 못하고 죄와 저주, 질병과 죽음과 절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통을 당한 인류 조상이지만 예수님은 두 번째 아담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없는 하나님이 죄있는 인간의 형체로 오셔서 이 땅에서 33년 살면서 인간의 모든 쓸데없는 일을 다 끌어안고 혼자서 다시 처리해 주신 분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새로운 안식을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와 만물을 지은 것처럼 예수님은 이 땅에 살면서 모든 인간의 일을 처리하고 십자가에서 청산하는 일을 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으며, 요한복음 14장 6절에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올라가셔서 우리와 내가 할 일을 다 책임지고 청산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기록하였으며, 히브리서 9장 28절에는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모든 짐을 다 짊어지고 무덤에 들어갔습니다. 무덤에 들어간 것은 우리 짐을 대신 짊어지고 죄값으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는 보증은 못됩니다. 주님이 죽으셨으면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지만 그것이 보증으로 증명되는 것은 무덤에 들어간지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사망과 음부를 철폐하시고 주님이 완전한 안식을 이루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로 30절에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짐은 무거우며 가볍지 않습니다. 즉, 예수의 멍에는 목숨을 내어 바친 피땀을 흘려 맡긴 무거운 멍에지만 우리의 멍에는 가벼운 멍에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다 짊어진 멍에 밑에 들어가서 따라만 가면 됩니다. 십자가의 멍에를 지심으로 예수께서는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는 역사가 다 이루어 놓은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고 순종만 하면 됩니다. 다 이루어 놓은 것을 믿고 순종만 하고 따라만 가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난 다음에 은혜롭게 산다는 것이 바로 그것인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피와 눈물과 땀을 흘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면 자신도 괴롭거니와 보는 사람도 괴로운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 놓으셨으니 다 이루어 놓은 안식에 들어가서 살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의 고생이 헛수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안식에 들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박차고 떠나 고생한 것처럼 되지 말고 믿음과 순종으로 주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은 새로운 안식으로 들어가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굉장히 귀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무나 사랑하는 자녀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서 다 이루어 놓은 것을 모르면 안됩니다. 먼저, 진리를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알았으면 그 다음에는 믿어야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입술로 “믿는다 믿는다”하면서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실천하려면 겁이 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따라서 애굽에서 나오기는 나왔는데 뒤에서 애굽의 대군대가 다시 잡으러 오니까 하나님을 따라 홍해수를 지나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던 것을 포기하고 도로 돌아가자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실천하려면 믿음의 모험이 필요합니다. 용감하게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하나님이 하라고 했으니 눈 딱 감고 해보는 모험 말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순종해 앞으로 나가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실천하지 아니하면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늘 긍정적으로 시인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내 입의 말로 내가 묶였으며 내 입의 말로 내가 사로잡힌다”고 성경에 말씀처럼 입으로 늘 진리를 말하면 마음이 확고해지고 늘 입으로 우리가 소원하는 바를 분명히 말하면 꿈이 분명해지고 반복해서 그렇게 입으로 시인하면 믿음이 튼튼해지고 입으로 시인하면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입술의 고백이 있어야 역사합니다. 아무리 예수 믿어도 입을 딱 다물고 있으면 성령이 운행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우리 입술의 고백을 통해 일을 하십니다. 입술로 부정적인 말을 하면 성령은 부정적인 영이 아니시기 때문에 아무 응답도 없습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성경말씀을 말할 때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입술로 고백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일하지 않으십니다. 시편 91편 2절에서 3절 말씀에 하나님을 보고 시편 기자는 뭐라고 말했습니까? “나는 야훼를 향하여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게 말을 하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말을 안하고 가만히 하나님 쳐다보고만 있으면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나는 나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도 가만히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상관있게 만들기 위해서는 입술로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는 나의 피난처요. 성령이 피난처를 만드신 것입니다.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이렇게 고백하면 하나님이 구만리 장천 멀리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 고백대로 날마다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요새가 되시고 의뢰하는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구만리장천 멀리 계시고 2천년 전이나 4천년 전의 말씀이 아니라 오늘 현재 이 자리에 나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반드시 입술로 고백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운행하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긍정적으로 고백하고 시인하면 하나님의 성령이 창조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늘 감사와 찬송을 하고 살아야 됩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에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은혜를 받았으니 감사와 찬송을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첫 아담이 하나님의 안식을 거부하므로 인류를 엄청난 고난으로 몰아넣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만들어 놓은 안식을 빼앗기고 온 인류를 고난과 고통의 구렁텅이 속으로 집어넣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인생으로 출발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새로운 안식을 이루어 놓으셨으니 옛 조상 원망하지 말고 새 조상 믿고 새로 태어나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아담 예수는 우리에게 새로운 안식을 주셨습니다. 이를 거부하면 멸망 받습니다. 살 길도 갈 길도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구원 못 받습니다. 그리고 구원받고 난 후에 이미 이루신 안식을 통해 범사에도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축복을 받고 살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예수님 안에서 “얼씨구나 절씨구나” 춤추고 기뻐하고 찬양하고 살아야 될 것은 주님이 다 이루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쓸데없이 걱정하고 근심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세상살이 중에 이마에 땀을 흘리고 고생하는 것은 쓸데없습니다.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을 가지는 것도 쓸데없습니다. 병들어 고생하는 것조차 쓸데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다 이루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새로운 안식에 들어가십시다. 믿고 순종하면 새로운 안식에 들어가게 됩니다. 첫 번째 안식은 놓쳤지만 두 번째 안식에는 들어가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고 평안하고 기쁘고 즐겁고 영광스럽게 살다가 영원한 안식인 천당 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 집도 우리가 짓는 집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예비하신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즐겁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이 세상 어디에도 참된 안식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참된 안식은 오직 지존자의 은밀한 그늘 밑에만 있음을 고백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잃어버렸던 참된 안식을 회복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합니다. 주님 부르시는 날까지 그 안식을 떠나지 않도록 성령님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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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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