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중복음과 삼중축복
⑫4차원의 영성(4) - 말
  • 4차원의 영성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롬 4:17) 하나님을 만나는 통로이다. 4차원의 영성으로 무장한 성도는 삶 속에서 변화와 기적을 맛보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사명자가 된다. 오늘은 4차원의 영성을 개발하고 강화하는 데 필요한 네 가지 핵심 요소들 중 마지막 요소인 ‘말’(언어)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말의 힘 인간의 말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내재되어 있다. 야고보서 3장에 보면 우리의 말을 묘사하는 두 가지 비유가 등장한다. 첫째는 말(馬)에 물리는 재갈이다.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약 3:3). 말의 입에 물려진 자그마한 재갈이 힘세고 덩치 큰 말을 제압하는 것처럼, 인간의 혀는 온 몸을 제어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큰 배를 제어하는 작은 키다.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약 3:4∼5). 물에 잠겨 보이지 않는 배의 키처럼, 우리 입속의 혀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고 삶 전체를 조정하는 위력을 보인다는 것이다. 말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도(창 1:3), 인간이 구원을 얻는 과정에도(롬 10:9∼10) 사용될 만큼 중요하다. 실제 생활에서도 한 마디 격려의 말이 한 사람의 인생을 수렁에서 이끌어내며, 반대로 생각 없이 툭 던진 말이 부모나 자녀, 또는 배우자에게 일평생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성경은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려있다고까지 말씀한다(잠 18:21). 2. 말의 속성 성경은 우리가 쓰는 말의 속성을 다양하게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면,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심신을 치유하는 약이 된다고 소개하고 있다(잠 16:24). 온순한 혀는 생명 나무와 같이 존귀하지만, 반대로 어리석고 속이는 혀는 자신과 타인에게 상처를 줄 뿐이라고 교훈하고 있다(잠 15:4; 전 10:12). 주목할 점은 우리의 말을 길들이기가 매우 어렵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모든 가축과 생물은 길들일 수 있지만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다고 말씀한다(약 3:7∼8). 신앙생활에 있어서 무엇보다 언어생활에 유의하며 매일 의지적으로 믿음의 말, 소망의 말, 사랑의 말을 훈련할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구절이다. 3. 성도의 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거듭난 사람은 언어생활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성도가 하나님을 찬양하던 입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헐뜯고 비난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마치 단물과 쓴 물이 동시에 나오는 샘처럼(약 3:10∼11) 쓸모가 없는 존재로 여겨질 뿐이다. 욥은 사탄의 참소로 인해 순식간에 재산과 자녀들을 잃고, 자신의 몸마저 심한 종기로 고통 받게 됐다. 그러자 그의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며 독설을 퍼부었지만 정작 욥은 그가 당한 모든 일에 대해 입술로 죄를 범하지 않았다(욥 2:9∼10). 이것이 우리가 본받고 따라야 할 언어생활이다. 독설을 퍼붓는다고 나아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성경은 입을 지킴으로 자기 생명을 보존하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잠 13:3). 결론적으로, 말은 4차원의 영성을 가장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요소이며, 나머지 세 요소인 ‘생각’과 ‘믿음’과 ‘꿈’을 현실화하는 지침서이다. 4차원의 영성은 성령 충만의 또 다른 표현이다. 성령님께서는 늘 용기와 위로와 희망의 언어를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신앙인이라면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인 말로 자신의 언어생활을 무장해야 할 것이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13.02.17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⑪4차원의 영성 (3) - 꿈
  •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변화된 영적 피조물이다(고후 5:17). 우리가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의 영적 원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생활에 적용하면 이전보다 더 깊은 영적 세계, 곧 4차원의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을 승리로 이끄는 은혜를 이미 예비해 두셨으며, 우리는 그 은혜를 이제 받아 누려야 한다. 지난 시간까지 우리는 우리의 삶을 승리로 이끄는 4차원의 영적 원리를 공부하면서 ‘생각’과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달았다. 오늘은 이어서 4차원의 영적 세계를 움직이는 네 가지 핵심 요소 가운데 세 번째인 ‘꿈’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1. 꿈의 속성 꿈은 신비의 영역이다. 오직 현실과 상황만 바라볼 때는 보이지 않던 가능성이 꿈을 꾸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4차원의 영적 원리로서의 꿈이란 이렇게 현실이 어려울지라도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며 소원과 비전을 마음에 품는 것을 말한다. ‘믿음’과 마찬가지로 ‘꿈’도 양방향으로 움직이는 힘이 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꾸는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꿈은 고귀한 결실로 이어진다. 마틴 루터의 꿈이,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꿈이, 임연심 선교사의 꿈이 그러했다. 반면, 욕심과 이기심으로 잉태된 꿈은 한 개인과 사회, 국가와 세계를 비극과 파멸로 이끌 수도 있다. 우리는 꿈의 이같은 놀라운 잠재력을 인식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바르고 거룩한 꿈을 꾸어야 한다. 2. 우리에게 꿈을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꿈이나 환상을 통해 성경 속의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셨다. 아브라함(창 15:1), 야곱(창 31:11∼13), 요셉(창 37:5), 솔로몬(왕상 3:5), 에스겔(겔 11:24), 다니엘(단 2:19), 마리아의 남편 요셉(마 1:20), 동방박사들(마 2:12), 베드로(행 10:9∼16), 바울(고후 12:1∼4)이 모두 꿈이나 환상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꿈을 꿀 수 있는 근거는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는 삼중으로 타락하여 죄와 절망 가운데 빠진 인류를 위해 삼중 구원과 삼중 축복을 베푸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번 꿈을 꾸게 하셨고, 은혜 안에서 아름다운 미래를 열어갈 수 있도록 해 주셨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하여 인류와 화해를 이루신 하나님(롬 5:10) 안에서 우리는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 3. 꿈꾸는 자 하루는 야곱이 그 아들 요셉을 불렀다. 형들이 양떼를 잘 치고 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하였다. 요셉이 형들 있는 곳을 발견했을 때, 형들은 요셉을 보고 “꿈꾸는 자가 오는 도다”라며 빈정댔다(창 37:19). 그리고는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자”(20절)라며 요셉을 죽일 생각으로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할 수 없는 시련에도 불구하고 후에 모든 일은 요셉의 꿈대로 이루어졌다(창 39∼45장). 꿈이 한 사람의 일생을 이끌어간다. 꿈과 환상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4차원의 영적 언어이다. 거룩한 꿈을 꾸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그 꿈을 이루실 것을 믿기에 기도하기를 쉬지 않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다. 꿈을 위해 목표를 세우고, 작은 일부터 실천해 나간다. 그러나 꿈이 없는 백성, 묵시가 없는 사람들은 계획도 실천도 없이 살다가 결국 쇠퇴의 길로 접어들고 만다(잠 29:18). 꿈이 있으면 순례자이지만, 꿈이 없으면 방랑자일 뿐이다. 이 시대에는 현실을 보고 체념하는 자가 아닌 ‘꿈꾸는 자’가 필요하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자신의 꿈을 현실로 옮기며 세상을 변화시키려 애쓰고 있다. 하물며 하나님 안에서 성도가 꾸는 거룩한 꿈의 힘과 파장은 실로 거대한 것이다. 현실 세계를 초월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을 품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이 시대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인물로 쓰임 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한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13.01.20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⑩4차원의 영성 (2) - 믿음
  • 지난 시간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우리의 실생활 속에서 적용하고 누리기 위해선 4차원의 영성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4차원의 영성은 생각, 믿음, 꿈, 말이라는 네 가지 요소에 영향을 받는다. 이 요소들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우리가 영적인 축복을 누릴 수도 있고, 반대로 육신이 속한 3차원의 세계에 머물며 무기력한 인생을 살 수도 있다. 이제 첫 번째 요소인 ‘생각’에 이어 두 번째 요소인 ‘믿음’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1. 믿음의 정의 히브리서 11장은 흔히 ‘믿음’ 장으로 불린다. 믿음 장에서 주목을 끄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1절에 등장하는 ‘실상’이란 단어이다. 실상을 헬라어로는 ‘휘포스타시스’라고 한다. 이는 ‘기초’, ‘확증’, 또는 ‘등기서류’란 뜻이다. 즉, 믿음이란 우리가 꿈꾸고 기대한 것들이 우리 앞에 실제로 펼쳐질 것을 확증해 주는 증빙서류와 같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홈쇼핑이나 인터넷에서 물건을 주문하면 그 물건이 언제 도착하는지 배달 과정을 전화나 인터넷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해 주는데, 우리는 믿음을 바로 그러한 서비스에 비유할 수 있다. 기도하고 바라는 것들이 아직 눈앞에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증을 받는다.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 것이나 무턱대고 믿는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의 믿음은 분명한 대상과 기초가 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로마서 10장 17절은 믿음의 출발이 그리스도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우리의 믿음은 맹신이 아니다. 우리의 믿음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 2. 믿음의 특징 믿음은 감각과 다르다. 감각이 듣고, 보고, 만지고, 느끼는 3차원에 머물러 있다면 믿음은 감각을 초월한 4차원에서 활동한다. 로마서 4장 18∼19절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던” 아브라함의 믿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감각을 초월한 믿음, 이것이 4차원적 믿음이다. 믿음은 운동 에너지를 갖고 있다. 믿음은 양방향으로 움직인다. 즉, 믿음은 긍정적인 방향으로도, 부정적인 방향으로도 움직인다. 긍정적인 믿음은 긍정적인 결과를, 부정적인 믿음은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좋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꿈과 희망을 주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태산 같은 문제가 앞에 놓여 있어도 굳센 믿음만 있으면 우리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진다. 사막이 변하여 꽃밭이 되고, 절대 절망이 절대 희망으로 변화된다. 3. 4차원의 믿음을 소유하려면 누구나 4차원의 믿음을 소유할 수 있다. 그렇게 하려면 우선 바라봄의 법칙을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목표를 바라보되 이미 이루어진 현실로 믿고 기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먼저 바라보게 하시고(창 13:14), 그 다음에 약속을 주셨다(15절). 또한, 심고 거두는 법칙을 활용해야 한다.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씨앗을 먼저 드리는 것이다. 사람은 무엇을 심던지 그대로 거둔다(갈 6:7∼8). 마음에 소원하는 바를 이미 받은 줄로 믿고 하나님께 감사하면 현실에서 감사할 일이 생기는 것이다. 4차원적인 믿음을 소유하는 가장 확실한 길은 성령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실 뿐만 아니라(고전 8:26), 하나님의 깊은 것도 통달하시는 분이시다(고전 2:10). 믿음의 사람이란 매 순간 성령님을 삶 속에서 인정하고, 환영하고, 의지하고, 모셔들이는 성령의 사람이다. 결론적으로, 아브라함에서 사무엘까지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4차원의 영성을 갖고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이다. 불신앙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지만(히 11:6), 믿음은 주님을 감동시킨다(마 8:10).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만을 들어 쓰신다. 우리도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인 믿음의 사람이 될 것을 다짐하자.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12.12.23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⑨4차원의 영성 (1) - 생각
  •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의 은혜가 주어졌음을 살펴보았다. 이제 이러한 전인적인 구원과 축복을 우리의 생활 속에 실제적으로 실현되게 만드는 영적 원리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4차원의 영성이다. 4차원의 영적 원리는 생각, 믿음, 꿈, 말이라는 네 가지 요소를 통해 현실화된다. 그중에서도 ‘생각’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능력을 우리의 삶 속에 풀어놓는 첫 번째 관문이다. 1. 4차원의 영적 세계와 인간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은 시간과 공간과 물질의 세계이다. 이에 비해 4차원의 세계는 시간과 물질과 공간을 초월해 있는 영적 세계이다. 영적 세계는 물질적인 세계보다 차원이 높으며, 영적인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물질적인 세계를 좌우할 수 있다. 우리가 거하는 이 세상 역시 단순히 물질적인 에너지로 인해서가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즉 성령의 운행하심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창 1:2, 히 11:3).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시간과 물질과 공간으로 대변되는 3차원에 속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물질 세계를 초월하여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4차원적인 영적 존재이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신자는 육신은 비록 3차원에 속해 있지만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4차원에 속하게 된다. 그러므로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인 능력으로 3차원의 세계를 다스릴 수 있다. 2. 4차원의 영성의 근거 -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우리가 누리게 된 전인적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이다. 고린도후서 5장 7절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선포하고 있다. 구원받은 신자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옛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나가 버렸다. 신자는 용서받은 의인이요, 치료받은 건강한 사람이요,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축복의 사람이요, 부활과 영생을 얻은 천국 시민이 되었다. 이제 신자는 예수님께서 보혈로 이루신 전인 구원의 복음을 믿음으로써 긍정적이고 복된 생각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 보혈에 근거한 축복의 생각은 신자의 삶에 새로운 능력과 축복을 가져다준다. 3. 4차원의 생각과 복된 삶 우리가 3차원적인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4차원의 생각을 가지게 되면 우리의 3차원적인 삶에 4차원적 영적 세계의 변화가 다가오게 된다. 이를 위해 첫째, 우리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생각해야 한다. 늘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생각을 닮아가야 한다.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인본주의적 생각을 버리고 나의 생각을 주님의 말씀에 접붙이면 나의 삶에 천국이 임한다. 둘째, 긍정적인 생각으로 무장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자기 자신과 삶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으로 무장해야 한다. 정죄 의식, 연약 의식, 실패 의식을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 받고 건강과 부요와 축복과 승리를 누리는 축복 의식, 승리 의식을 가져야 한다. 셋째, 부정적인 생각을 대적해야 한다. 새사람의 축복을 누리려면 우리의 생각 속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분노, 미움, 공포와 불안, 두려움, 좌절과 슬픔, 죄악과 세속에의 욕망과 맞서 싸워야 한다. 죄 짓고, 병약하고, 실패하고, 불행한 자신에 대한 생각을 벗어버려야 한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은 의인이요, 건강과 승리를 누리는 축복의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생각’에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신자는 부정적이고 패배적인 옛 사람의 생각을 벗어버려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의지하고 기도를 통해 긍정적, 창조적, 생산적인 4차원의 하나님의 생각, 새사람의 생각으로 무장해야 한다. 새로운 생각으로 무장한 새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전인 구원의 축복이 충만하게 역사할 것이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12.11.18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⑧삼중축복(3)-육체적 축복
  •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위해 예비하신 에덴동산은 건강과 생명이 넘치는 환경이었다. 에덴동산에는 질병도 연약함도 없었다. 인간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낙원에서 완전한 건강과 생명의 축복을 누렸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반역하고 죄를 지은 결과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의 형벌과 저주가 임하였다. 인간은 영적 죽음은 물론이고 육체적 질병과 사망을 맞이해야 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통하여 인간은 다시금 건강과 생명과 영생을 누리게 되었다. 신자가 누리게 된 육체적 축복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가? 1. 인간의 범죄와 육체적 저주-질병과 사망 아담과 하와가 죄짓고 타락한 결과 인간은 영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되었을 뿐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범죄한 인간에게 사망의 권세가 다가와 인간의 영혼을 부패시킬 뿐 아니라 질병을 통해 육체를 죽이기 시작한 것이다. 로마서 5장 12절은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귀는 인간의 타락과 죄로 인해 합법적 근거를 가지고 신체적, 정신적인 온갖 질병을 가져와 인간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킨다. 인간은 이처럼 질병과 사망의 세력으로 인해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다가 끝내 육체적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절망적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육체적 저주의 대속 이사야 53장 5절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지상에 계실 때 가는 곳마다 죄를 용서하시고 병자를 고치셨다. 죄의 용서와 질병의 치료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예수님의 죄사함의 보혈은 인간에게 다가오는 질병과 육체적 죽음의 세력을 무력화시킨다.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육체적 저주가 철폐 된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질병을 대속하시기 위해 온 몸에 대속의 채찍을 맞으심으로 우리의 육체를 파멸시키는 모든 정신적, 육체적 질병의 세력을 무장해제 시키셨다.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사망권세를 완전히 철폐하시고 우리에게 부활의 생명을 부여하셨다. 고린도전서 15장 42절로 45절에는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인간의 육체적 연약함과 질병과 사망의 저주는 건강과 생명과 영생의 축복으로 변화되었다. 3. 육체적 축복과 섬김의 삶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대속의 공로로 건강과 생명의 축복을 개인과 가족과 공동체의 삶 속에서 누려야 한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마귀가 가져다주는 연약함과 질병의 세력을 단호히 거부하고, 예수님의 치료를 주장해야 한다. ‘나는 연약하다’라는 의식을 버리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건강한 의식을 가질 뿐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몸을 잘 관리해야 한다. 육신의 건강은 영적 건강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죄를 버리고, 절제하며 규칙적인 생활을 통하여 육체적 건강은 물론 영적으로도 건강한 삶을 누려야 한다. 신자의 건강한 삶은 이 세상의 어둠을 밝히고 부패를 방지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이 땅에서의 삶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언젠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의 몸은 영원히 썩지 않을 영광의 몸으로 변화될 것이다. 그때까지 신자는 끊임없이 죄와 질병과 연약함과 사망의 세력에 맞서 싸우며 경건한 삶을 지켜야 할 것이다. 주님이 오시는 그날과 완전한 영화의 축복을 소망하며 이 땅에서 자신의 몸을 거룩한 산제물, 의의 병기로 예수님께 드려 헌신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전인 구원의 축복은 영혼 구원의 축복뿐 아니라 육체적인 건강과 생명과 영생의 축복을 포괄하는 축복이다. 신자는 자신의 삶 속에서 연약하다는 의식과 질병을 단호히 거절하고, 건강과 생명을 시인하며 건강한 삶을 누려야 한다. 나아가 이웃과 세상을 섬기고, 정화하는 의로운 삶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할 것이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12.10.21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⑦삼중 축복(2)- 환경적 축복
  •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인간의 영혼뿐 아니라 환경과 육신을 포함하는 전인적 차원의 구원이다. 죄를 범하고 타락한 인간에게 주어진 삼중의 저주(영적 죽음, 환경적 저주, 육신적 죽음)는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대속되어 삼중 축복(영적, 환경적, 육신적 축복)으로 전환되었다. 그 중에서 성도에게 다가온 환경적 축복은 어떠한 것인가? 1. 환경적 저주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타락한 결과 인간은 영적으로 죽게 되었을 뿐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 저주가 다가왔다(창 3:17∼18).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풍요와 축복의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온갖 종류의 저주를 받으며 삶 속에서 피를 흘리며 투쟁해야 했다. 인간관계에서도 불신과 미움과 원망이 들어차게 되었다. 또한 이마에 땀을 흘리며 수고롭게 일을 해도 가난과 저주로 인한 생존 문제로 불안과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땅에는 경제적, 사회적 문제로 전쟁이 끊이지 않아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죽게 되었다. 나아가 오늘날에는 물질에 대한 이기적인 욕심과 탐욕으로 인해 자연이 파괴되고 남용됨으로써 환경 문제가 인류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2. 십자가 대속을 통한 환경적 저주의 대속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절대 절망에 처한 인간의 삶 속에 찾아오셨다. 예수님께서는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환경적 저주를 깨끗하게 속량하셨다(고후 8:9, 갈 3:13∼14).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인간의 저주를 대속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 속에서 저주의 세력이 철폐되었다. 인간관계 속에 역사하여 사람들의 마음과 사회를 황폐하게 만드는 미움과 불안과 초조, 공포와 절망 등의 가시가 제거되고 평화와 화목이 가득 차게 되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마음에 평안이 오고 이웃과의 관계에 평화가 임하게 되었으며, 가난에 허덕이며 늘 생활고에 쫓기고 불안하던 삶 속에 부요가 임하게 되었다. 또한 파괴하고 남용하던 자연 생태계에도 돌봄의 손길을 통하여 회복과 치유가 임하게 되었다. 3. 환경적 축복과 나눔의 풍요 우리의 삶은 예수님을 믿고 영혼이 잘됨을 따라 범사가 잘된다(요삼 1:2). 범사는 인간을 둘러싼 사회적, 경제적, 인간관계적, 생태 환경적 측면을 포괄하는 인간 삶의 전반적인 환경적 조건과 상태를 말한다. 환경적 축복이란 이 같은 인간 삶의 전 영역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의 은혜로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평안과 부요와 축복이 임하게 된 것이다. 나아가 예수님께서 주신 가장 큰 계명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마 22:37∼40)이다. 이제 예수님의 은혜로 누리게 된 물질적, 관계적, 사회 경제적 평안과 부요와 축복은 개인의 축복으로만 소유하고 누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축복을 통하여 영혼을 살리는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물론 그리스도의 사랑과 축복을 이웃과 세상과 온 땅에 나누어야 한다. 그러므로 순복음의 ‘나누어 주는 신앙’은 개인적, 자기중심적 욕구 충족으로 끝나는 이기적인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과 부요와 축복을 이웃과 세상을 섬기는 자원으로 삼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함께 나누며 하나님의 축복에 초대하려는 성경적 축복신앙이다. 받기만 하고 나누지 않는 신앙은 물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것처럼 생명력 없는 신앙으로 정체하고 만다. 하나님께 받은 축복을 끊임없이 이웃과 함께 나눌 때 더욱 풍성하고 생명력 있는 신앙의 열매를 맺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야 하는 소명감을 가지고, 받은 축복을 신실하게 나눔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인간의 삶의 총체적 부분에 다가온 삼중 저주는 인간의 죄와 타락의 형벌로서 삶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절망의 요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대속으로 모든 저주를 철폐하심으로 화목과 평화, 부요의 축복이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에 임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는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환경적 축복을 받아 누릴 뿐 아니라 이 축복을 이웃과 나누어 세상에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삼중 축복의 복음을 널리 전해야 할 것이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12.09.16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⑥삼중축복-영적인 축복
  • ‘삼중축복’의 신앙이 발생하게 된 사회적 배경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직후 폐허가 된 한국 사람들의 절망적이고 처절한 삶이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대조동 천막교회 시절, 성도들은 절망 가운데 가난과 질병과 씨름하며 살았다. ‘삼중축복’은 이처럼 절망 가운데 놓여 있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통하여 영적, 환경적, 육적인 축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은 단순히 영혼만을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저주받은 환경으로부터 그리고 육체적인 질병으로부터의 구원까지 포괄하는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삼중축복의 첫 요소인 ‘영적인 축복’은 무엇을 의미하며 어떤 희망을 제공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인류의 영적인 타락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범죄의 결과로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더 이상 하나님과 교제하고 대화할 수 없는 영적인 죽음을 맛보게 되었다. 인간은 영적인 타락으로 인하여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항상 불안과 공포 그리고 좌절감과 절망에 둘러싸여 살아가게 되었다. 타락한 인간은 철학과 명상이나 다양한 종교들을 통하여 영적인 절망을 극복하려고 시도해 왔지만 모두 헛된 노력일 뿐이다. 타락한 인간이 영적인 절망을 벗어나 영적인 희망을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영적인 축복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의 영적인 절망의 화폭에 새로운 희망을 그려 넣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이시다. 아담의 범죄는 인류에게 영적인 타락을 가져왔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에게 영적인 구원을 가져와 인간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고 교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라고 외치셨을 때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사라지고 죽음 가운데 있던 우리의 영혼이 구원을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어떠한 악한 죄를 지은 죄인이라도 갈보리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 회개함으로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해하면 영적인 구원을 얻게 된다. 십자가는 인간이 하나님과 단절 되었던 관계를 회복하는 영적인 화해의 장소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자들은 구원을 선물로 받는다. 십자가를 통하여 인간은 죄인이 아닌 의로운 사람으로 더 이상 부끄러움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거룩한 자격을 부여 받는다. 3. 영적인 축복을 받은 자들의 삶 우리는 영적인 구원을 받음으로써 상실했던 하나님과의 교제를 다시 회복할 수 있게 된다. 영적인 축복을 받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지속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서 기도, 말씀, 그리고 예배에 힘써야 한다. 그들은 성령과의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깊은 지식을 깨닫게 되고(고전 2:9, 10) 나아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할 수 있게 된다(롬 12:2).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아가는 삶이 곧 영적인 축복을 받은 자들의 삶이다. 영적인 축복을 받은 자들은 영적인 일에 보다 더 우선순위를 두며 살아가게 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영혼의 공허함과 허무함을 안고 살아간다. 사람들의 생활은 풍요해졌어도 영적인 안식과 진정한 평안을 누리지 못하고 불안과 초조함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진정한 영적인 축복을 주시는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축복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이 주님 안에서 진정한 안식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12.08.19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⑤천국과 재림의 복음
  • 인류를 위해 다시 오시는 예수님 예수님의 재림은 성경이 전해주고 있는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이다. 예수님은 장차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땅의 모든 민족들이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4:30).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주요 목적은 다음과 같다. ①창세 이래로 죽은 모든 사람들을 다시 살리셔서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다. ②죄악으로 파괴된 우주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오시는 것이다. ③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오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지 않은 죄인들은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고, 예수님을 믿은 의인들은 영화롭게 변화되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영원한 천국으로 들여보내질 것이다. 의인들이 들어가게 될 천국은 더 이상 사탄의 유혹, 죄악, 질병, 고통, 죽음이 없는 영원한 안식과 행복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언제 재림하시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성경은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고 말씀하셨다. 재림의 시점은 철저히 하나님만이 아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 날짜와 시간을 확정해서 가르치는 사람들은 성경적 가르침에서 이탈한 이단일 위험성이 있으므로 접촉이나 교제를 매우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의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성경의 가르침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오실 때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음을 깨닫고 준비하는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 성경은 예수님의 재림 이전에 ①복음이 온 천하에 전파되고(마 24:14), ②적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사람들을 미혹하여 배도하게 하는 일이 있을 것이라고(살후 2:3) 말씀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이 있은 후에 예수님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함께 공중에서 재림하시고, 성도들은 공중으로 휴거되어 예수 그리스도와 7년간의 혼인잔치를 벌이게 될 것이다(계 19:9). 그러는 동안 지상에 남겨진 사람들은 7년간의 환난이 임하여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그 후에 예수님께서 지상에 재림하셔서 아마겟돈 전쟁에서 사탄을 따르는 무리를 잡아 유황불이 붙는 못에 던지고, 사탄을 천 년간 무저갱에 가두실 것이다(계 19:20∼20:3). 그리고 천년왕국을 건설하실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은 천년동안 왕노릇하면서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천년왕국 기간이 지난 후에 무저갱에서 잠시 풀려난 사탄이 다시 사람들을 미혹할 것인데(계 20:7∼8), 이를 통해 사람들의 신앙이 진정한 것인지 아닌지 다시 한 번 구분받게 된다. 그 후에 하나님의 백보좌가 세워지고, 창세 이후로 죽었던 모든 자들이 부활하여 백보좌 앞에서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된다. 이 심판에서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은 불못으로 던져지게 되는데, 이것이 둘째 사망이며 영원한 사망이다(계 20:14∼15). 반면에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은 신부가 신랑을 위해 단장한 것과 같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가 영원한 안식과 복락을 누리며 살게 된다(계 21:2). 우리는 언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고 이런 일들이 일어날지 정확히 알지 못하기에 첫째, 항상 신앙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마 24:42∼51). 둘째, 열심히 전도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멸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령하신 것은 다가올 재림을 대비하도록 하신 것이다(마 28:18∼20, 막 16:15∼18, 행 1:8). 국제신학연구원 제공
  • 2012.07.15 / 순복음가족신문 기자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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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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