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인 목사의 성경주제연구
다양한 인간의 속성
  • 상호의존적이며 감정 따라 욕망 추구하기도 하지만 고난 통해 하나님 찾게 되고 종국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완성 인간은 실로 천의 얼굴을 갖고 있다. 그 다양한 모습을 몇 가지 범주로 구분해볼 수 있다. 1. 사회 속의 인간 1) 개인과 공동체 구약에서 개인과 공동체는 하나처럼 나타난다. 이스라엘(창 32:28)이나 에돔(창 36:1) 구스와 가나안(창 10:6,22) 등이 개인과 부족 이름이 같다. 개인은 공동인격의 한 부분이므로 죄와 형벌 및 축복이 서로 연관된다. 범죄로 인해 고라와 그 일당이 심판받았으며(민 16:31~35) 아간과 그 가족도 함께 처벌당했다(수 7:24~26). 율법을 어긴 자에 대한 삼사 대까지 형벌이 나타난다(신 5:9). 반면에 축복도 개인과 공동체가 공유한다. 노아와 그 가족이 함께 구원을 받았으며(창 6:9,18), 아브라함의 언약이 상속된다(창 12:1~3).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천 대까지 복 받는다(신 5:10). 한편 나라가 멸망하게 되자 선지자들은 개인적인 심판과 축복을 천명한다(렘 31:29~30). 이제는 범죄 하는 당사자가 형벌을 받을 것이다(겔 18:14~18). 마찬가지로 축복도 자기 의로 자기만 구원받는다(겔 14:13~14). 개인과 공동체 사상은 시대에 따라 강조점이 다르다. 대체적으로 구약시대에는 공동체적 구원이 강조되고, 신약시대에는 개인주의적 구원이 강조된다. 2) 윤리적 존재로서의 인간 예언자들은 주로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는 사회윤리를 강조했다(암 5:21~24). 그러나 욥기나 잠언에서는 개인적 윤리가 강조된다. 욥은 존경받는 자로 고아, 과부, 장애인들을 돌보았다(욥 29:12~17). 하인을 선대하였고 주린 자를 공궤하며 재산보다 의를 믿었다(욥 31:13~25). 잠언에서 강조하는 지혜와 의, 공명, 정직은 윤리적 이상을 표현하고 있다(잠 1:2~3). 그런데 윤리의 근원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근거한다. 인간은 양심이나 사회적 관습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욥 28:28, 잠 9:10)에 의해 선행을 하므로 성서윤리는 보편성을 갖게 된다. 2. 피조물로서의 인간 1) 생령인 인간 야훼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창 2:7). 인간은 땅의 티끌, 히브리어로 '아파르'에서 나왔다. 아파르의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를 말할 때 쓰인다(창 3:19; 욥 10:9). 이처럼 인간은 흙으로 만든 육체이므로 병들고 죽어 사라진다(욥 14:1~2; 시 103:15~16). 그 점에 있어서 시공의 제한을 받는 동물과 차이가 없다(시 49:12, 전 3:18~20). 그런데 흙속에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 생령이 되었다. 흙과 생기가 결합한 생령(네페쉬 하야)이 인간이다. '네페쉬'는 혼을 말하지만 지·정·의의 좌소이며 인간 전체를 의미한다. 2) 구성요소를 따른 인간관 네페쉬의 인간은 혼적 인간이다. 네페쉬가 흔히 식욕(전 6:7) 감정의 욕구 등 욕망을 뜻하므로 네페쉬의 인간은 갈망하는 인간이다(시 42:2). 또한 이성적인 사람은 히브리어로 마음을 뜻하는 '레브'의 인간이다. 마음은 소원(시 21:2), 지성적 기능(잠 15:14), 도덕성의 좌소(렘 17:9)이므로 레브의 인간은 이성적인 인간을 말한다. 그러나 영을 따르는 인간은 루아흐의 인간이다. 루아흐는 인간의 종교적 활동의 원동력과 능력이며, 진선미를 추구하게 한다. 그래서 루아흐의 인간은 종교적 인간이다. 끝으로 몸의 인간은 히브리어로 바사르의 인간이다. 바사르는 살(레 19:28), 신체(창 40:19), 생식기(창 17:11) 등을 뜻한다. 바사르의 인간은 몰락하는 인간이다(창 6:3; 시 56:4). 3) 일원론적 인간 인간이 영과 혼과 육으로 구성되었다는 삼분설은 초기 기독교회의 교부들이 많이 지지했다. 영혼과 육의 이분설은 어거스틴 이후 라틴교회에서 주장되었다. 인간은 육이며 영인 동시에 혼도 된다. 인간은 감정도 되고 의지도 되고 마음도 된다. 그러나 인간은 이중 어느 하나가 아니고 그 전체이며 상호 의존적일 때 그 인간성을 드러낼 수 있는 일원론적 존재이다. 3. 인간 실존 1) 자유존재로서의 인간 구약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인간의 자유를 축소시키거나 억제하지 않는다. 인간은 실제적 측면에서 자유롭다. 라멕 자손에 의한 문명의 시작 등 창세기의 인간의 삶에는 자치적 모습이 완연하다. 인간은 윤리적 측면에서도 자유롭다. 룻의 자발적인 시어머니 봉양, 형제 요셉을 파는 것 등을 볼 때 인간이 자유적 존재라는 것은 확실해진다. 종교적 측면에서도 자유롭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순종과 불순종을 선택할 수 있다(신 30:19). 그 자유적 결단에 따라 복과 저주를 받게 된다(신 11:26~28). 율법이 있다는 그 자체가 윤리적 자유를 전제하고 있다. 2) 종교적 인격으로서의 인간 구약에서 가장 특이한 면은 종교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인간은 고통과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시 4:8; 6:8~10; 13:1~2). 그 결과 피난처, 힘,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고난의 인간은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시 42:1~2). 하나님의 은혜에 부딪칠 때 인간은 목소리(시 34:1)와 손바닥(시 47:1), 악기(시 81:1~2) 등으로 찬양한다. 더 나아가 인간은 하나님 자신에 대한 갈망으로 전진한다(시 63:1~3). 그 최고선이 하나님과의 영적교통에 있으므로 의인의 고난에 대한 의문점이 여기에서 해결된다(시 73:17~23). 인간은 고난으로 하나님을 찾게 되고, 점차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되며 종국적으로 하나님 안에서 완성된다.<끝> 한상인 목사(광주순복음교회)
  • 2020.12.13

    인간의 정체성
  •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영의 존재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거듭난 새 신분 얻게 돼 옛날 그리스에 포악한 괴물인 스핑크스가 지나가는 길손들에게 퀴즈를 내고 못 풀면 잡아먹곤 했다. 스핑크스의 퀴즈는 아침에는 네 발로, 낮에는 두 발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이 무엇이냐는 문제였다. 스핑크스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묻고 있다. 1. 현실의 인간 존재 1) 피조물 인간 인간은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눅 3:23~38). 피조물인 사람은 동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동물을 초월한다. 사람이나 짐승의 육체는 흙으로 만들어져서 유사한 점이 많다(창 2:7,19). 그러나 사람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의 존재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으므로 인간은 왕 같이 다스리는 존재이다(창 1:27~28).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지배하고 이용하는 능력을 주셨다. 태양열과 바람과 물을 이용하고 우주여행까지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고 사육하는 권세를 주셨다. 사람이 타락한 후로 하나님 형상의 많은 부분을 잃어버렸으나 완전히 짐승처럼 된 것은 아니다. 더욱이 예수님을 믿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후 5:17).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복 받은 사람이 된다(갈 3:14). 2) 고난의 존재 시지프스의 신화에 보면 고린도 왕 시지프스가 시민들을 위해 마르지 않는 샘물을 얻게 해준다. 그러나 그는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서 높은 산으로 바위를 끌어올리는 형벌을 받았다. 그의 비극은 바위를 끌어올리는 순간 다시 바위가 산 아래로 굴러 떨어져 끊임없이 수포로 돌아가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고난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숙명의 굴레가 아니라 죄로 인한 것임을 밝히 말씀한다. 그래서 죄가 없어지면 고난도 없어지는 것이다. 인간이 범죄 하므로 3중형벌이 다가왔다. 영의 죽음으로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져 생명과 평화와 기쁨이 끊어졌다(창 3:10). 환경적 저주로 인해 생활의 불행뿐 아니라 사회적 고통(구조악)과 정신적 황폐가 임했다(창 3:17~18). 종국적으로 인간은 질병과 늙음과 육체적 죽음으로 흙으로 돌아가는 고통과 비극을 겪게 되었다(창 3:19). 이처럼 죄로 인한 고난 이외에 인간의 고난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욥과 같이 정금처럼 단련하는 의인의 고난(욥 23:10)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자적 고난(렘 1:4~10) 메시아의 대속의 고난(사 53:4~6) 등이 있다. 그러므로 성경의 고난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시 119:71). 2. 하나님의 구원의 인간 1) 의와 성결과 권능의 새사람 죄의 고난에 처한 인간은 이면적으로 구원의 은혜 앞에 서 있는 존재다. 인간은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아담과 하와에게 구원을 약속하시고(창 3:15) 마지막으로 그 아들을 보내셔서 죄를 없애주신 것이다(히 9:28).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인해 사람들은 죄로 말미암아 버림받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기 때문에 버림받는다(막 16:16). 예수님은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들어오라고 초청하신다(마 11:28~30; 계 3:20).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으면 생명을 얻되 풍성히 얻게 된다(요 10:9~10). 영 혼 육에 복을 받는 삼중축복과(요삼 1:2), 오중복음으로 이 땅에서 천국을 미리 맛보며 살게 된다(마 11:12). 공중권세 잡은 악의 영을 물리치고 예수 안에서 문제를 해결 받는 것이다(엡 6:10~17). 나아가서 성결과 권능의 은혜를 받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처럼 말씀을 주셔서 죄악을 이기는 성결의 은혜를 받게 된다(롬 13:13~14).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갖가지 권능을 주신다(행 4:29~31). 2) 거듭난 새 신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려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 유대인들의 선생인 니고데모는 영생의 확신과 죄 사함의 자유가 없어서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예수님은 그에게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다(요 3:5~7). 인간을 변화시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다시 태어나야 한다. 믿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면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산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롬 12:1). 새사람은 새로운 특성을 가진다. 새사람은 새로운 이름을 가진다. 예수님께서는 은밀한 새 이름을 주신다(계 2:17). 또한 새사람은 새로운 신분을 가진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새 신분을 주셨다(출 19:5~6).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요 1:12) 4중 신분을 얻게 된다(벧전 2:9). 나아가서 새사람은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된다.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을 따라 살아감으로써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롬 6:9). 부활의 능력으로 치료받으며 가난과 저주에서 벗어나 형통한 복을 받는다. 3) 새사람의 사명 새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 세상을 이기며 살아간다. 떡만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살아가며(마 4:4) 말씀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며 살아간다(시 119:105). 산상수훈의 말씀처럼 세상의 소금과 빛(마 5:13~14) 원수에 대한 사랑(마 5:43) 하나님 중심으로 기도와 금식과 구제를 하며 살아간다(마 6장). 하나님께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서(마 7:7~8)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간다(롬 8:14). 새사람은 생각(빌 4:8)과 꿈(욜 2:28) 믿음(히 11:6) 말(잠 18:21)의 4차원의 영성의 사람이다. 끝으로 그리스도인은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자인 것이다(행 5:42). 한상인 목사(광주순복음교회)
  • 2020.11.08

    교회의 제직(2)
  • 인격적으로 책망할 것 없는 자여야 충성할 때 의 생명 영광의 면류관 받아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성도들을 믿음과 사랑으로 세우며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다. 그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지역교회에 직분자를 세우셨는데 교단 헌법에 교회의 항존적 직분으로 목사와 장로 안수집사 권사가 있다. 1. 장로(長老, elder) 1) 장로의 기원과 직무 장로는 히브리어 ‘자켄’(늙다)에서 나온 단어로 연장자란 뜻이다. 신약시대 장로는 헬라어 ‘프레스뷔테로스’이며 여기에서 프레스비터(presbyter)가 나왔다. 구약 족장시대부터 장로가 있었으며(창 50:7) 모세 때 백성들의 대표로 장로를 세웠다(출 18:21~25). 장로들은 종교적 역할과 재판 전쟁의 지휘자 권면 행정 등을 수행하는 공동체의 대표였다(레 4:13~21; 신 21:1~9). 그런 장로의 역할이 신약시대 초대교회에 계승되고(행 11:30) 그것이 이방인 교회로 확대되었다(행 14:23; 20:17). 따라서 신약시대 교회의 장로도 구약시대와 유사한 사역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장로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구속하신 교회의 일을 수행하는 자로서 주님의 뜻대로 일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 일에 책임을 다하며(마 25:29~30)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며(고전 9:27) 주님 앞에서 날마다 죽어야 한다(고전 15:31). 장로는 목사와 함께 교회를 치리하며 행정사역을 수행하여 담임목사를 보좌한다(출 18:25; 행 6:3). 2) 장로의 자격과 피택 장로는 인격적으로 책망할 것이 없고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해야 한다(딛 1:7; 딤전 3:1~7). 가정생활에 있어서 한 아내의 남편으로 이혼한 경력이 없으며 자녀들은 방탕하거나 불순종한다는 말이 없어야 한다(딤전 3:2; 딛 1:6). 바울은 개척한 선교 교회에 장로를 세워 나갔다(행 14:23; 딛 1:5). 바울이 제1차 선교여정 중에 장로를 택하였는데 ‘택하다’란 헬라어 ‘케이로토네오’는 ‘거수로써 선출하다’는 뜻이다(행 14:23; 고후 8:19). 아마도 각 회당에서 백성들의 대표로 선출되어 회당에서 기도와 안수로 장로로 임명되었을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바나바와 바울이 직접 장로들을 택하여 임명했다. 2. 안수집사(按手執事, deacon) 1) 집사의 명칭과 임무 집사는 헬라어로 ‘디아코노스’인데 종이나 명령 수행자 시중드는 자 등을 의미한다.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디아코네인’은 “음식을 나누어 준다”는 뜻이다. 이처럼 집사직은 유대 회당에서처럼 교회의 구제사역을 위해 임명되었다(행 6:1~6). 성경의 집사는 오늘날의 서리집사가 아니라 안수집사를 말하며 그들은 무엇보다도 주님처럼 섬기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다(막 10:45). 집사는 그리스도의 선하고 신실한 일꾼(골 1:7; 딤전 4:6)으로 충성돼야 한다(고전 15:10). 2) 안수집사의 자격과 임직 안수집사는 성령 충만해야 하며 지혜가 충만하여 실무를 감당할 수 있는 실제적 능력과 지각이 있고 칭찬 듣는 사람이어야 한다(행 6:3). 교회생활에 있어서 깨끗한 양심과 믿음의 비밀이 있어야 한다(딤전 3:9). 가정생활에 있어서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딤전 3:12). 사회생활에 있어서 돈과 음주 언행에 큰 잘못이 없어야 한다(딤전 3:8). 그것은 집사가 대외적인 봉사의 일을 많이 담당하기 때문이다. 집사의 임직 절차를 보면 교인들이 선택했고 사도들이 안수하고 기도하여 임명했다(행 6:6). 집사의 임직에 전교인이 참여했으며 그들의 임명은 회중 전체의 이름으로 시행된 것이다. 3. 권사(勸士, exhorter) 1) 권사의 명칭과 유래 교회에서 권사 제도를 선정한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영국의 감리교회에서 시작되었으며 한국에서는 20세기 중반 교회에 도입되었다. 초대교회에서 젊은 여자들을 가르칠 수 있는 연로한 여자와 권위하는 일을 은사로 받은 직분이 함께 결합한 형태를 오늘날의 권사라고 말할 수 있다(딤전 5:9~10; 딛 2:3~5; 롬 12:8). 2) 권사의 자격과 임무 권사는 안수집사와 같은 자격을 구비해야 한다(딤전 3:8). 특별히 디모데전서 3장 11절에 나오는 여자에 대한 언급도 충족시켜야 할 것이다. 초대교회 문헌에 의하면 여집사는 침례시 성직자를 보조하거나 가난하고 병든 여자를 돌보고 예비신자나 갓 입교한 여자들을 가르치며 여신자들을 성직자와 연결시키는 매개역할을 했다. 권사는 믿음의 선한 사역에 힘써야 하는 바, 복음 증거(요 4:39)와 교역자와 교인들을 돕고 봉사하는 사역(빌 4:2~3) 기도와 예언을 하는 사역(고전 11:5) 등을 수행한다. 오늘날 권사는 담임목사를 받들어 교회에 봉사하며 교우를 심방하고 권면하며 특별히 병자와 고난당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에 힘쓰며 신앙 향상을 위하여 덕을 세우며 충성하는 명예로운 직분이다(교단헌법 제55조). 4. 제직의 축복 현재 삶에서 제직들이 봉사를 통해 심은 대로 거두는 하나님의 축복을 풍성히 받게 된다(마 6:33; 갈 6:7). 그들은 세상의 파도를 헤쳐 나가는 믿음의 담대함을 얻는다(딤전 3:13). 또한 충성한 제직들은 하늘나라에서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며(마 25:21) 열 고을의 권세(눅 19:17) 같은 영원한 복을 받는다. 의의 면류관(딤후 4:7~8) 생명의 면류관(약 1:12; 계 2:10) 영광의 면류관(벧전 5:4) 금 면류관(시 21:3; 계 4:4) 등을 받을 것이다. 한상인 목사(광주순복음교회)
  • 2020.10.11

    교회의 제직(1)
  • 사도 선지자 복음전도자 목사로 부르심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온전케 하는 사역 모든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교회를 온전하게 하시는 여러 직분을 주셨다. 사도와 선지자 복음전도자 목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온전케 하는 사역자들이며 장로와 안수집사 권사는 사역자들과 함께 교회를 세우고 봉사하는 제직들이다. 1. 사도(The Apostles) 1) 예수님의 열 두 사도 사도는 교회의 첫째가는 직분으로(고전 12:28)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열 두 사도들을 선택하셨다(눅 6:13). 사도의 자격은 예수님의 선택을 받고 예수님의 사역초기부터 함께 있었으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자라야 한다(행 1:21~22). 사도직은 교회의 필요로 세우신다(행 1:24~25). 상황에 따라 할례자의 사도 베드로(갈 2:8)와 이방인의 사도 바울(롬 1:5) 등 사도직에 다른 역할을 주신다. 사도직의 계승은 불가하며 원사도들은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특별히 바울의 사도직은 예수님의 소명에 의한 것이다(행 9:15; 갈 1:1). 2) 일반적 직분으로서의 사도 사도란 헬라어로 '아포스톨로스'로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런 의미의 사도들은 열 두 제자인 원사도들과 같은 권위가 없으며 영감 받은 성경말씀을 남기지 않았다. 그들은 특정교회를 대표했으나 대개 한곳에 머물지 않고 광범위한 목회활동을 했다.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사도는 교회의 직분임을 암시함으로써 일반적 사도라고 할 수 있다(고전 12:28). 일반적인 직분의 사도는 복음의 불모지에 교회를 능력 있게 세우며 기사와 이적이 뒤따른다. 시대와 지역마다 주어지는 사도가 교회를 흥왕하게 한다(엡 4:11~12). 2. 선지자(The Prophets) 1) 신약의 선지자 교회를 세우는 두 번째 사역자인 선지자는 사도와 함께 거룩하신 하나님의 경륜을 전해주는 직분이다(엡 3:4~5). 초대 교회의 선지자로 아가보(행 11:27~28) 안디옥 교회의 선지자(행 13:1~2) 유다와 실라(행 15:32) 등이 있다. 선지자는 미래의 일들을 예언하고 어떤 일을 지시하며 성도들을 격려하고 강건하게 하는 사역을 수행한다. 요한계시록에서 선지자들은 만물의 마지막에 대해 하나님의 비밀을 말한다(계 10:7). 요한도 선지자로서(계 22:9)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으로 계시를 전했다(계 1:10; 4:2; 17:3; 21:10). 2) 계속적인 선지자들의 사역 선지자가 복음 전하는 자들과 목사 교사와 나란히 언급되고 있어서 원사도와 일반적인 사도의 은사가 있는 것처럼 원선지자들과 일반적인 선지자들이 있다고 보인다. 교회에는 예언의 은사가 있으므로(롬 12:4~6; 고전 12:10) 은사를 받은 성도들이 예언할 수 있다. 하지만 선지자는 예언 사역을 전담하는 사역자이다. 선지자는 유다와 실라처럼 교회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며 덕을 세우고 권면하고 안위한다(행 15:32; 고전 14:3). 3. 복음 전하는 자(The Evangelists) 1) 복음 전도의 의미 복음 전하는 자는 '복음(유앙겔리온)을 선포하는 전도자(유앙겔리스테스)'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도요 선지자이신 것처럼 복음전도자이시다(막 1:14; 눅 4:18; 4:43). 또한 제자들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주시기 때문에(행 4:29)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행 8:4). 사도들도 복음전도자이며(행 5:42) 바울과 바나바(행 14:6~7) 베드로(벧전 1:25)가 그렇게 사역했다. 2) 전문적인 복음전도자 빌립 빌립은 본래 음식 공궤하는 일로 집사가 되었다(행 6:1~6). 박해가 일어나자 사마리아에 내려가 복음을 전하고(행 8:5),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했다(행 8:35). 아소도의 여러 지방을 다니며 전도하다가(행 8:40) 가이사랴에 정착하여 전도자 빌립이 되었다(행 21:8). 그는 성령 충만했으며(행 6:5) 성령의 인도하심을 항상 받았으며(행 8:29) 성령의 능력이 나타났으며(행 8:6~7)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식이 있었다(행 8:35). 4. 목사(The Pastors) 1) 목자로서의 목사 목사는 성도들에 대한 목양에 치중한 명칭으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무리를 돌보는 사역을 한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시며(요 10:11) 큰 목자이셔서(히 13:20) 목자장이 되신다(벧전 5:4). 예수님께서는 작은 목자의 직분을 베드로에게 주시고(요 21:15~17) 다른 사람에게도 그 뜻대로 부여해주신다(벧전 5:2). 목자는 양떼의 행동을 감독하되 양무리의 본이 돼야 한다(벧전 5:3).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줄 만한 희생의 각오로 양들을 잘 지켜야 한다(행 20:29~31). 2) 교사로서의 목사 교사는 목양보다는 말씀을 가르치는 것에 치중하여 부르는 명칭이다. 예수님은 선생님으로(눅 22:11) 가르치신다(마 9:35). 그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며(마 4:4) 이로써 생명을 얻게 해주신다(요 6:63). 가르침의 근본은 성경에 있으며 그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이기 때문이다(딤후 3:16~17). 교사로서의 목사는 하나님 말씀에 전념해야 한다(딤전 4:13). 진리의 말씀을 분별하며 허탄한 교리와 거짓 가르침(딤후 2:15~17; 딛 1:12~14) 바른 교훈을 벗어난 미혹하는 귀신의 가르침을 물리쳐야 한다(딤전 1:3~4; 4:1~3). 한상인 목사(광주순복음교회)
  • 2020.09.13

    (33) 사랑
  •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인내하고 이해하는 것 믿음 소망 사랑 중 제일 영원한 건 ‘사랑’ 그리스도인은 빛 가운데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빛의 삶은 사랑의 삶이다. 사랑이란 헬라어 ‘아가페’는 신약에서 총 116회 나타나는데 바울서신에서 75회 사용되었다. 1. 사랑의 추구 예수님은 사랑의 삶에 대한 모범을 보여주셨다.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고(요 13:34),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교훈하셨다(마 5:44).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시고(요 13:1) 마지막 십자가에서까지 용서하시고 사랑하셨다(눅 23:34). “내가 길이다”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것은 사랑 가운데 행하는 것이다(엡 5:2). 그리스도인이 여러 가지 은사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무익하다(고전 13:1~3). 고린도 교인들은 은사에 부족함이 없었으나 분파와 분쟁(고전 1:10~13) 시기와 다툼(3:3~4) 교만과 자랑(4:6~7; 5:2~6) 소송(6:1~8) 지식과 자랑(8:1~13) 애찬의 교만(11:17~34) 등으로 시끄러웠다. 영적 갱신의 중요한 과제는 능력이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이 충만한 은사 공동체는 하나님의 권능과 임재의 위대한 장소가 된다. 2. 사랑의 긍정적 요소 사랑은 인내이다. 사랑의 인내란 규모 없고 힘없는 자들에 대해서 참고 기다리는 것이다(살전 5:14; 약 5:7). 그것은 타인의 행동을 관용하는 것이며(엡 4:1~2) 용서하는 것이다(골 3:12~13). 또한 사랑은 친절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비(딛 3:4~5)와 온유로 나타난다(엡 4:2). 예수님은 온유하셔서(마 11:28~29)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신다(마 12:20).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유모처럼 온유했으며(살전 2:7) 겸손과 온유로 행하도록 에베소 교인들을 권면하며(엡 4:1~2) 죄를 범한 자를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으라고 권한다(갈 6:1). 나아가서 사랑이란 긍휼이다. 긍휼은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며(막 1:41; 눅 7:13~15) 자비다(눅 6:35~36). 자비란 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에게 긍휼의 마음으로 사랑을 베풀어주는 것이다(약 2:13). 3. 사랑과 반대되는 요소 어둠이 빛을 드러내듯이 사랑과 반대되는 요소가 사랑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먼저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 시기하는 것은 창수 같고(잠 27:4) 불길 같이 강렬하다(아 8:6). 그러나 그 강렬함은 결코 사랑의 힘이 아니다. 고린도교회의 큰 문제는 시기질투였으며 분쟁과 파벌이었다(고전 1:11~12). 그것은 영적 아이(3:1)와 육신에 속한 사람의 특징이었다(3:3).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다. 자랑은 자기중심적이지만 사랑은 타자지향적이며 하나님 중심적이다(아 6:3). 고린도 교인들은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이었지만(고전 1:26~28) 성령의 은사가 은혜라는 것을 잊고 자랑하였다(고전 4:7). 또한 사랑은 교만하지 않는다. 고린도 교인들은 말만 앞세우고(고전 4:18~20) 심각한 성적 타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만하였다(고전 5:1~2).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며 사랑으로 행하지 못하게 한다(고전 8:1).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않는다. 고린도교회의 여자들은 당시로서는 머리에 수건을 쓰지 않는 무례를 범했다(고전 11:5). 주의 만찬 때 무질서하게 애찬을 나눴으며(고전 11:20~21). 방언과 예언을 할 때에도 무질서하여 품위가 없었다(고전 14:40). 나아가서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한다.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지만(롬 14:7~8) 고린도 교인들은 다른 사람의 유익에 관심이 없었으며(고전 6:7~8) 연약한 형제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고전 8:9~13). 그러나 사랑은 절제하며(롬 14:21) 이웃을 유익하게 하는 것이다(빌 2:4).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 성낸다는 헬라어 ‘파록쉬노’는 날카롭게 만든다는 뜻이다. 그런 분노의 가시는 남뿐만 아니라 자신도 찌른다. 또한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한다. 세상의 많은 일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악한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화목하게 하신다(고후 5:19). 끝으로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불의한 사회적 경제적 활동과 개인적인 죄악 등을 기뻐하지 않고(잠 9:13~18) 오직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4. 사랑의 범위와 영원성 사랑은 모든 것을 참는다. 모든 것이란 예외가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무리들의 비방과 배신을 참으셨다(마 27:42). 심지어 제자들의 배신(마 26:31)과 십자가의 모든 수난을 참으셨다. 그리스도인이 참는 것은 복음에 장애가 없기 위함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는다. 키에르케고르는 ‘사랑의 사역’에서 “불신이란 모든 것을 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믿지 않는 것이며, 사랑은 모든 것을 파악한 후에도 여전히 불신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사랑은 모든 것을 파악했지만 여전히 믿는 것이다. 또한 사랑은 모든 것을 바란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다(롬 4:18). 세상적인 소망은 마음에 상처를 주지만(잠 13:12) 성경적인 소망은 결코 좌절되지 않으며(롬 5:5) 비관적이지 않다(롬 8:24). 마지막으로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딘다. 사랑의 인내는 무한하다. 택한 자의 구원을 위한 인내는 끝이 없으며(딤후 2:9~10) 어떠한 핍박과 고난에도 굴복하지 않는다(딤후 3:10~11). 그러므로 사랑은 영원하다. 때가 되면 예언도 방언도 지식도 폐한다. 그러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영원하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다(롬 8:38~39; 고전 13:13). 한상인 목사(광주순복음교회)
  • 2020.08.09

    빛과 영광
  • 하나님 자녀 된 우리는 주 영광 나타내는 삶 살아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최초로 빛을 창조하셨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하나님의 자녀들 속에서도 빛이 제일 먼저 창조된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된다. 1. 빛과 그리스도인 1) 빛의 자녀 예수님은 생명이시며 빛이시다(요 1:4). 예수님은 세상의 빛으로 오셨으며(요 8:12; 9:5; 12:46) 어둠과 죄가 없으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빛의 백성이다. 빛을 믿고 빛의 자녀가 된다(요 12:36; 엡 5:8). 성도들은 빛 가운데 있으며(골 1:12~13), 구원받고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된다(벧전 2:9). 2) 빛의 삶과 전도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둠에 속한다(엡 5:8). 이 세상은 여전히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어둠의 세상이다(빌 2:15).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빛이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이며, 그로 말미암아 빛 가운데 행해야 한다. 그것은 음행과 더러움과 탐욕을 떠나(엡 5:3)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 가운데 있는 것이다(엡 5:9). 고린도교회는 각종 은사가 나타났지만, 빛 가운데 행하지 않으므로 많은 고통을 겪었다. 분쟁이 있었으며(고전 1:11~12), 음행의 죄가 그 중에 있었다(고전 5:1). 그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고발하고 다투었으며(고전 6:1), 과식과 탐식의 죄를 짓고 있었다(고전 11:20~21). 그러므로 고린도교회처럼 은사가 많이 나타나는 교회일수록 풍성한 영적의 권능이 거룩한 행함과 연결되도록 힘써야 한다. 아무리 영적 은사가 다양할지라도 그것이 의와 선과 진리를 대신할 수 없다. 3)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빛의 삶 빛이신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행했다(요 8:29).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힘을 다했다(살전 2:4). 이처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초점이다(살전 4:1). 이는 금세뿐 아니라 내세에 있어서도 삶의 동기와 목표이다(고후 5:9).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총체적으로 배워야 한다(엡 5:10).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빛으로 살아갈 뿐만 아니라 악하고 더러운 일을 피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은 빛 가운데 행함으로써 악을 드러내고, 어둠의 일들을 책망하는 것이다(엡 5:11). 또한 그리스도인이 빛 가운데 행할 때 많은 축복을 받게 된다. 성도들과의 순수한 교제가 이루어지며 자기주장과 질투 경쟁심 자만심 등의 어두움이 물러간다(요일 1:7). 성령의 빛으로 어둠을 깨닫고 회개하면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깨끗하게 해주신다(요일 1:9). 2. 하나님의 영광 1) 영광의 빛 빛 중에 가장 빛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다. 하나님은 빛나는 영광중에 계신다(요일 1:5). 영광은 하나님의 본체와 초월성 성품 완전성 등의 속성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존재와 행동의 모든 면을 통해서 나타나는 빛나는 광채와 정의로운 위엄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성경 전체를 통해 장엄하게 선포한다. 특히 시편에는 영광에 대한 선포가 가득하다. 주님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으며(8: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19:1), 만군의 야훼는 영광의 왕이시며(24:10),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며(57:5), 야훼께서 영광중에 나타나셨으며(102:16), 영광이 천지에 뛰어나시다(148:13).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을 둘러싸고 있는 후광과 같다. 에스겔은 야훼의 영광의 형상을 보았으며(겔 1:27~28), 사도 요한도 하늘에 올라가 영광의 보좌를 볼 수 있었다(계 4:3). 2)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 하나님은 그 행동이 영광스러우며, 그가 하시는 모든 일에서 영광이 드러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바로에게서 구출하신 후 모세와 백성들이 야훼의 행하심의 영광을 노래했다(출 15:11). 하나님은 그 이름에 있어서도 영화롭다(신 28:58; 대상 29:13; 느 9:5; 시 72:19; 사 63:14).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는 집(사 60:7), 처소(사 63:15), 보좌(렘 17:12) 등이 모두 영화로우시다. 또한 성도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가 영광스럽다(엡 1:6).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은 찬양의 정점이 된다. 다윗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찬양하고 거룩한 옷을 입고 경배하라고 한다(시 29:1~2). 신약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 천사들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찬양했다(눅 2:14). 바울은 영광이 주님께 세세토록 있다고 찬양했다(롬 11:36). 종말의 최후의 전쟁이 있기 전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서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한다(계 19:7). 3) 독생자의 영광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원하는 욕망이 있다. 모세조차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의 영광을 보기 원했다(출 33:18). 하나님은 그의 영광으로 이 땅을 채우시기를 원하신다(민 14:21).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본 요한은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라고 말한다(요 1:14).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기” 때문이다(고후 4:6). 그리스도인은 이미 모세의 소원을 체험한 사람들이며, 더 나아가 다가올 세상에서 영원히 그의 얼굴을 보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계 22:4). 한상인 목사(광주순복음교회)
  • 2020.07.12

    (31)삼위일체 하나님
  • 성부 성자 성령 세 위격으로 한 분을 의미 칼뱅은 “하나님 본성에 대한 깊은 지식”으로 설명 기독교는 한 분이신 하나님을 믿는 유일신 신앙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이 나타난다. 성경의 그러한 표현들을 기독교의 유일신 신앙과 조화시킨 용어가 삼위일체이다. 1. 성경의 유일신 신앙 성경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선포한다. 세상은 예부터 수많은 신들을 섬겼고 현대에도 일본에 800만 우상, 인도에 3억 3000만 우상이 있다. 그러나 삼천몇백 년 전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섬겼다(신 4:39). 신약시대에서도 예수님은 한 분이신 하나님을 천명하셨으며(막 12:29) 하나님이 한 분이심을 가르친다(딤전 1:17). 유일신 신앙에는 커다란 장점이 있다. 신자의 관심과 헌신을 한 곳에 집중시키며(신 6:5) 개인적인 삶과 사회 전반에 통일성을 준다(엡 4:6). 2. 세 위격의 성부 성자 성령 위격이란 하나님의 인격을 표현하는 말이며 하나님은 세 위격으로 한 분이시다. 구약성경의 첫 구절에 언급된 하나님은 히브리어로 ‘엘로힘’이며 그 자체로 복수 형태를 사용한다(창 1:1). 또한 하나님이 ‘우리’라는 용어로 말씀하신다(창 1:26). 구약에서 하나님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표현이 나타남으로써 위격의 차이를 깨닫게 된다(창 19:24; 사 48:16). 그러나 위격이 선명하게 구별되는 것은 신약성경이다.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실 때 삼위의 하나님이 뚜렷이 구별된다(막 1:10~11).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베푸는 침례는 세 위격의 이름으로 시행된다(마 28:19). 각 위격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이시다.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시다(사 64:8; 갈 4:6). 아들로 불리는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이시다(시 2:7; 막 1:1; 히 1:8~9). 성령 하나님은 구약에서 단독적으로 하나님으로 표현되지 않지만 ‘주의 성령’이 언급된다(시 51:11).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성령이나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언급된다(엡 4:30). 성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존재케 하시는 창조주이시다. 창조의 하나님인 엘로힘은 위엄과 전능의 하나님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엘 엘욘)으로 우주와 인간과 멀리 떨어진 위대하신 하나님이시다(창 14:19). 창조의 원천이신 하나님은 삼위일체 중 성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창조주 아버지이시다(신 32:6). 하나님을 창조주로 말할 때 특히 성부 하나님을 가리킨다(사도신경). 창조주 하나님은 인격적이며 언약적인 야훼로 모세에게 계시되었다(출 3:15). 성자 예수님은 성육신하사 육체가 되었다. 성자 예수님이 말씀이 되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다(창 1:3). 말씀은 창조의 도구이며 대행자이다(시 33:6, 9).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 만물을 지으셨다(요 1:1, 3). 말씀에 의해 원시적인 무형과 무질서에서 형태와 질서가 나타났다(골 1:17). 성령 하나님은 창조의 원동력이다. 창조의 모든 것이 성령의 역동적인 활동으로 이루어졌다(욥 33:4). 성령께서 창조 전에 이미 모든 것 위에 운행하고 계셨다(창 1:2). 그래서 우주 만상이 성령으로 이루어졌다(시 33:6). 성령께서 땅에 있는 모든 만물에게 활력을 주신다. 성령님이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신다(창 2:7; 겔 37:10). 성령님은 단순한 하나님의 능력이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행 5:3~4). 성령은 바람 물 불 기름 비둘기 등으로 상징되지만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해야 한다. 성령은 성부 하나님의 인격적 현현이 아니라 진리의 영이시다(요 15:26). 3. 세 위격 안에 계신 한 하나님 기독교 신관의 특징은 한 하나님께 세 위격이 계신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인간의 이성과 지식으로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천사로 보거나 하나님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기는 그릇된 신앙의 이단 종파들이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으로서 성부 성자 성령의 위격이 있으며 이는 결코 세 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세 위격은 동일한 본질이며 니케아 신조에 의하면 호모우시오스(homoousios)로 결코 나누어지지 않는 총체적 본질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는 것이나 성령이 발출하였다는 것은 본질이 아니라 위격을 말하는 것이다. 각 위격은 신격 전체를 포함하고 있으며 분리되지 않는다. 모든 위격의 하나님은 서로 구별된다. 성부는 성자가 아니며 성자는 성령이 아니다. 세 위격은 영원히 존재하며 그 명칭은 단순한 은유가 아니다. 초대교회의 용어에 따르면 한 본질 안에 세 실체가 있다. 성부의 특성은 성자를 영원히 출생한다는 것이다. 비출생적인 성부가 성자를 출생하는 것은 본성의 고유성으로 인한 것이다. 성자의 특성은 아들 되심이다. 아버지로부터 개별적 실체를 물려받았으며 영원히 아들이시다. 성령의 특성은 발출이다. 성령은 영원히 아버지로부터 나오신다. 칼뱅은 『기독교강요』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하나님 본성에 대한 깊은 지식이라고 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을 삼위일체로 설명하면, 창조는 하나님으로부터(from) 나오고 성자로 말미암으며(through) 성령에 의해서(by) 이루어진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인간의 지성으로 완전히 이해하거나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하나님께 헌신하고 찬양으로 영광을 올려야 할 것이다. 한상인 목사(광주순복음교회)
  • 2020.06.14

    (30) 계시와 신지식
  • 하나님은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 전지전능하심 인정할 때 진정한 자유 얻어 호세아는 "야훼께로 돌아가자. 그가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해주실 것이다. 이틀이 지나면 살아나겠고, 사흘이 지나면 걸어 다닐 수 있게 해주실 것이다"라고 말한다. 놀라운 신지식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질병이나 문제가 생겨도 낙심하지 않게 된다. 1. 하나님에 대한 지식 1) 신지식의 중요성 하나님에 대한 지식, 즉 신지식(神知識, the Knowledge of God)은 인간의 궁극적 관심이다. 인간이 자신을 아는 최고의 단계는 하나님에 대한 앎이다. 철학자 폴 틸리히는 하나님은 인간의 궁극적인 관심이라고 말했다. 2) 신지식은 성경의 주제 성경의 전면을 흐르고 있는 주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고통 중에서도 욥은 하나님을 찾는다(욥 23:3). 빌립처럼 사람들은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한다(요 14:8).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참으로 하나님 알기를 원하신다(렘 9:23~24). 그러나 사람들은 원함이 있어도 진실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사 1:2~3). 2. 하나님을 아는 방법 1) 하나님의 신비 하나님은 평범한 방식으로 알 수 없는 신비이다(왕상 8:12). 오토(R. Otto)는 하나님을 '전율적 신비'라고 표현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은 비밀이며(엡 1:9) 그리스도의 사역도 신비이다(엡 3:4). 그것은 하나님의 무한성과 인간의 유한성 때문이다(사 55:8~9). 또한 하나님의 거룩성과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하나님을 알 수 없다(사 8:17). 2) 계시(Revelation) 계시란 헬라어로 '아포칼립시스'인데 '드러낸다'는 뜻이다. 계시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종속계시로 나눠진다. 일반계시는 자연을 통해서(롬 1:20), 인간의 양심을 통해서(창 1:26),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암 9:7)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다. 일반계시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과 신성, 하나님의 자비와 관심(시 145:15~16), 하나님의 의로움(롬 1:32) 등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인간의 죄로 인해 일반계시가 왜곡되고 상실되어 계시의 이해에 한계가 많다(롬 1:18, 21). 특별계시는 일반계시의 왜곡과 오용과 타락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된 것을 깨닫게 해준다. 하나님께서 특정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셔서 그들로 성경의 역사를 이루어가게 하신다(시 103:7; 창 12:3). 특별계시는 점진적이어서 덜 분명한 단계에서 보다 완전한 단계로 발전해간다(갈 3:24). 특별계시는 구속적이어서 일반적인 창조와 역사적 계시를 넘어서 죄악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준다(사 43:3). 특별계시는 언어적이어서 일반계시와 달리 말씀을 통해서 계시하신다(시 19:2~3). 특별계시는 인격적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신다(출 3:13~14). 인격적 계시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 14:9).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에 아들을 통해 말씀하시며(히 1:1~2),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직접 말씀하신다. 이전 예언자들의 계시는 예비적이고 부분적이며 일시적이었으나 이제 최종적인 계시로 나타났다(마 5:21~22). 하나님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와 임재를 통해 완전하게 말씀하셨으며 사도적 증언을 통해 최종적 형태와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엡 3:4~6). 한편 종속계시는 특별계시에 종속되거나 부차적인 계시이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세심한 계시를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다. 개인적으로도 성령을 통한 계시를 주셔서 지혜와 계시를 풍성하게 해주시며(엡 1:17),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를 이해함에 있어서 계속 성장하게 해주신다. 3) 믿음 믿음은 계시를 받아들이는 자에게 신지식이 생기게 하는 도구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의 역사하심과 목적들이 믿음으로 증거를 얻게 된다(히 11:1). 죄악으로 어두워진 심령에 하나님의 계시가 임할 때 믿음으로 이를 수용함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써 하나님이 창조주요 구속자이심을 알 수 있게 된다(히 11:6). 3. 하나님의 본체 1) 살아계신 하나님 성경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선포하며 여러 번 고백한다(마 16:16). 하나님은 죽은 우상과 전혀 다르다(렘 10:3~5). 하나님은 자신 안에 생명을 가지신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의 생명의 근원이 아니며 하나님은 우주적 생명에 따라 변화되거나 증식되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창조와 보존과 섭리로 인간을 구원하신다. 하나님은 생존이 아니라 영존하는 살아계신 분이다(시 42:1~2). 2) 인격이신 하나님 하나님에 대한 인간적인 표현이 많이 나온다(시 2:4). 하나님은 지정의의 인격을 가지신다. 사랑하시고 미워하시며 책망하시고 분노하시며 인격적 관계를 맺으신다(사 41:8~9). 하나님은 결정하시고 심판하신다(사 55:8). 3) 영이신 하나님 영이시므로 형체가 없으시며 살과 피가 없으시다(눅 24:39). 하나님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불가사의한 분이시다(딤전 6:16). 영이신 하나님은 행동하신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행동 가운데 계시며 창조주 하나님이시다(요 3:8). 영이신 하나님은 자유하시다.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신 후에도 우주에 얽매이지 않으신다. 인간관계에서도 얽매이지 않으시며 강요받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그의 자녀들도 자유케 해주신다. 질병과 죄악과 죽음에서 자유를 주신다(고후 3:17). 한상인 목사(광주순복음교회)
  • 2020.05.10

  •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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