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를 타신 예수님
2026.03.29
/ 마태복음 21장 6∼9절
“제자들이 가서 예수께서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태복음 21장 6∼9절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여 드리는 참으로 뜻깊은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모든 백성이 나와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겉옷을 펴서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종려나무 가지를 펴고 그렇게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이 시작됩니다. 이 한 주간을 ‘고난 주간’, ‘수난 주간’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복음서의 약 30%가 마지막 일주일간의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33년 반 동안 사셨는데, 3년 반 동안 공생애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일주일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사복음서의 3분의 1 가까이, 그리고 마가복음하고 요한복음의 약 40%가 마지막 1주간의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주일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월요일에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에 모든 장사하는 사람을 내쫓으시며, 성전을 정결케 하셨습니다.
화요일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종교 지도자들과 많은 논쟁을 하십니다. 수요일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일 공모를 하고, 예수님은 기도와 명상으로 십자가 고난을 준비하셨습니다.
목요일,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최후의 만찬을 하신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시다가 금요일이 되었을 때 한밤중에 가룟 유다가 군인들을 이끌고 와서 예수님을 붙잡아 당시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 안나스에게로 데려가고, 그다음 가야바 대제사장에게 가서 심문을 받고, 실제적인 모든 권한을 쥐고 있는 빌라도 총독에게 갔다가 다시 헤롯왕에게 가서 심문을 당하고, 다시 빌라도 총독에게 와서 최종 사형 판결을 받습니다.
이 모든 것이 새벽 3시부터 6시까지 적법한 절차 없이 불법 재판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사, 오후 3시에 운명하십니다.
토요일, 안식일에는 무덤에 쉬고 계시다가 주일 새벽에 주님은 부활하십니다. 이 한 주간은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생각하는 뜻깊은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천여 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주님의 그 겸손하신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왕처럼 당당하게 말을 타고 앞뒤에 호위 군사를 이끌고 들어오신 것이 아니라, 어린 나귀 새끼를 택하여 그 나귀 새끼를 타시고, 겸손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만왕의 왕 되신 예수님께서 가장 겸손하고 낮아진 모습으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예언은 약 500년 전에 스가랴 선지자가 이미 예수님의 이와 같은 예루살렘 입성을 예언해 기록해 놓았습니다.
스가랴 9장 9절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왕들은 자기의 위엄과 권세를 나타내기 위해서 출정을 나갔다가 돌아올 때 말을 타고 들어오면서 대행렬이 앞뒤로 호위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백마, 흰말을 타고 들어왔습니다. 그 어디에도 왕이 나귀를 탔다고 하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 되신 예수님께서 가장 평범하고 초라하신 모습으로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나귀를 타셨을까요? 나귀는 평범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의 짐을 나르고 또 사람들을 태우고 다니는 일상생활의 수단이었습니다.
나귀는 평화의 상징이요, 겸손의 상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힘없고 평범한 존재인 나귀 새끼를 택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진 자, 힘 있는 자의 편이 아니라 언제나 평범한 자, 약자의 편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평범하고 힘없는 나귀 같은 우리를 택하셔서 하나님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나갈 때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을 때, 내가 잘나서 그렇게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는 것이 아니라, 나를 타고 계신 예수님 때문에 박수갈채를 받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잘 되면 착각합니다. 다 자기가 잘나서 그렇게 된 줄 아는데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우리가 잘 될수록,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권력을 쥐고 힘을 휘두를수록, 더 겸손히 낮아져 약자를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그냥 무기력하고 연약한 나귀 새끼 같은 존재입니다. 그 나귀 새끼 자체로는 무엇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내고 겉옷을 깔고, 그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환영한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받는 칭찬, 예수님 때문에 받는 그러한 영광스러운 모습을 내 것으로 착각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평생 주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으려면 우리는 늘 나귀처럼 겸손히 주님을 잘 모시고,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겸손은 예수님 모습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께 쓰임을 받으려면 예수님을 본받아서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 말씀을 바꿔 말하면 너희 마음에 쉼이 없고 평안함이 없는 것은 너희가 겸손하고 온유하지 못해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왜? 내가 잘나서, 강한 성격으로 내 고집, 내 주장을 하다 보니까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입니다.
강한 성격과 교만한 모습은 내 주변에서 사람이 떠나게 하지만,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은 내 주변에 사람이 몰려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겸손과 온유의 사람이 되어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주님의 귀한 일꾼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오늘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의 모습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압제하에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로마는 통치하는 모든 나라에 군사를 보내 많은 세금을 거둬들였습니다. 또 로마 정권에 아부하는 세금 걷는 세관원들은 덧붙여서 중간에 착복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로마로부터 해방될까?’ 저들의 마음속에 간절한 해방에 대한 꿈이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니까 메시아가 와서 우리를 해방시켜준다는데, 그 메시아가 누군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말을 듣고, “예수님이 그러면 우리를 로마에서 구원해 줄 왕이시겠구나.” 그래서 열렬히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8절에 보니까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1) 겉옷을 길에 편 백성들
저들이 겉옷을 길에 폈습니다. 고대 사회에 자기 옷을 땅에 펴는 행위는 자신의 권리와 지위를 내려놓고 상대방에게 복종과 충성을 다짐하는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다는 그러한 저들의 충성된 모습으로, 복종의 모습으로 겉옷을 펴서 깔았던 것입니다. 구약시대 예후가 왕이 될 때 이와 같은 기록이 나옵니다.
열왕기하 9장 13절입니다.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가져다가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이르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예수님을 왕처럼 모시며 저들은 옷을 깔고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2)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폄
나아가서 저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그 가지를 길에 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당시 유대 나라에 있어서 승리의 상징이요 해방의 상징이었습니다. “로마를 무너뜨릴 메시아가 오셨다!” 그 뜻을 담아서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편 것입니다.
(3)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침
그리고 그들은 나가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를 외쳤습니다.
마태복음 21장 9절입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호산나’라는 말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를 로마 제국에서 구원해 주옵소서! 저들이 간절히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호산나는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요, 간구였습니다.
시편 118편 25절입니다.
“야훼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야훼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저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을 외쳤는데,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를 상징하는 칭호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에게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다윗의 왕권을 회복할 메시아여!”하고 저들이 외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열렬히 예수님을 환영했던 무리가 닷새 만에 마음이 싹 돌변합니다. 저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오셔서 백성들을 선동해, 무장 봉기해서 혁명을 일으키고, 로마 제국을 대항해 싸울 줄 알았는데, 도리어 성전에 와서 장사꾼을 내쫓으시고, 성전에 가서 장차 말세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언제 마지막 때가 올지 모르니까 준비하라”고 하는 이해되지 않는 말씀만 전하시고,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의 마음이 싹 돌아섰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로마에서 구원해 줄 메시아가 아니야.’ 그래서 닷새 만에 마음이 완전히 돌변해, 그 예수님을 환영했던 군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못 박으소서”라고 외친 성난 군중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마가복음 15장 6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무리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은혜받을 때는 눈물 콧물 쏟으면서 ‘내가 죽도록 주님을 위해서 충성 헌신하겠습니다.’라고 다짐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해서 그저 교회 일이라면 너무나 기쁘고 감사해서 앞장서서 일을 하고, 열심히 주님 앞에 헌물을 드리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나가서 전도하고 하다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사람들이 날 알아주지 않고, 뭔가 내 뜻대로 안 되면 ‘섭섭이’라는 귀신이 들어와 혼자 시험에 듭니다.
그렇게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그냥 예배를 드릴 때마다 찬송을 불러도 기쁘고, 말씀을 들어도 기쁘고, 기도해도 감사해서 눈물이 났는데 눈물은 싹 말라 버리고, 마음이 굳어져서 마음에 기쁨이 사라지고, 감사가 사라지고, 사소한 일에 원망, 불평하고, 남을 비판하고 있다면 이 무리와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다음에 다가온 현상이 무엇이냐? 예배에 대한 감격이 사라집니다. 예배의 주인은 예수님이신데,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마음이 돌아선 무리와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옵소서. 첫사랑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내가 나 혼자 시험에 들어서 불편해하고, 감사가 사라지고, 기쁨이 사라지고, 그래서 남을 비판하고 있고, 불평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다시 첫사랑을 회복할 수 있도록 주님 은혜 내려주옵소서.”
요한계시록에 예수님께서 에베소교회를 책망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4절, 5절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켜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 내가 첫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눈물이 메말랐습니다. 감사가 메말랐습니다. 내가 조금씩 불평하게 되고,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지 않고, 내가 무시당하면 혼자 섭섭해서 시험에 들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나 혼자 불평하며 살았던 내 모습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여러분, 다시 첫사랑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사랑의 감격을 갖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일생을 함께하시며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 첫사랑의 감격으로 선교사가 되어서 한국 최초의 순교자가 된 토마스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영국 웨일스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목회자의 가정에서 선교 비전을 꿈꾸며, 어머니의 기도 속에 자랐습니다.
1859년 런던대학교 뉴칼리지에서 신학 과정을 마치고, 1863년 목사 안수를 받은 그해 7월에 24살의 나이에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아내 캐롤라인 고드프리와 함께 중국 상하이로 향합니다. 몇 달 걸려 상해에 도착했는데 부인이 풍토병에 걸렸습니다. 당시 아이를 임신한 상태라 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선교사가 아내를 돌볼 수 있는 선교지를 찾으러 간 동안에 그만 아내가 유산했습니다. 급히 자기에게 메시지가 전해져 왔는데 ‘나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아내의 편지를 받고 선교지로 돌아갔지만, 아내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습니다.
20대 초반에 꽃다운 나이에 남편을 따라 중국 선교를 왔다가 아이를 잃고, 자신도 목숨을 잃게 된 것입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너무나 충격이 컸습니다. 그때 그를 파송한 런던선교회에 보낸 편지의 내용입니다.
“저는 지금 감당할 수 없는 슬픔으로 인하여 제 마음을 걷잡기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그녀의 평화롭고 고통 없는 죽음에 대하여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주신 자도 야훼시오, 취하신 자도 야훼시니 야훼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라. 1864년 4월 5일.”
아내를 잃은 슬픔 가운데 잠시 선교사역을 멈췄는데,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엄슨 목사님이 지금 조선에 복음을 듣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절망 가운데 살고 있다고 조선의 선교사로 가라고 권면합니다. 그때 그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저는 그동안 제 믿음이 좋아서 이곳 중국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게 된 줄 알았는데 캐롤라인의 죽음 앞에서 사정없이 흔들리는 제 약한 모습을 보면서 제가 참으로 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선교는 자식을 무덤에 묻는 아픔 없이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셨던 분들의 이야기가 실감이 납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잠시도 제 스스로 설 수 없는 자란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래서 1865년, 그는 조선의 첫 선교사로 와서 황해도 장연(백령도)지역에서 3개월 동안 머물면서 한국말을 배우며 성경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1866년 이듬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통역으로 승선해서 두 번째 조선을 향해 옵니다.
당시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펼쳐 조선에 오는 외지인들을 적으로 여겼기에 배가 대동강으로 들어오자 배를 공격했습니다. 배가 대동강 중간의 섬에 걸리게 되니까 위에서 조선 수군들이 조그만 조각배에 불을 붙여 내려보내 배가 불타게 됐습니다.
불길에 휩싸여 있는 그 순간에도 “예수! 예수! 예수!”를 외치면서 그 앞에서 뛰어내려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 앞에 성경을 주며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주여, 이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복음이 이 땅에 열매 맺게 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1866년 9월 2일, 27살의 젊은 나이로 대동강의 백사장에서 순교합니다. 제가 평양에 심장병원을 지으러 가서 평양 지도를 사보았습니다. 그 지도에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한 그 자리를 ‘선교강안거리’라고 표시해 놨고, 그 지역 전체가 ‘선교구(區)’로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북한 사람들이 선교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고 쓰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마포구, 동대문구는 있어도 선교구는 없거든요. 근데 북한의 평양에는 ‘선교구’가 있습니다. 언제고 북한의 문이 열리면 우리가 그 순교자의 자리에 가서 우리가 예배드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날이 다가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를 찔러 죽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박춘권은 그에게 던져준 성경을 가지고 와서 예수를 믿은 다음 ‘안주교회’ 영수가 되고 그 가족들이 평양에서 신앙 명문가를 이루고, 조카 이영태도 ‘평양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후에 성서번역의 주역인 레이놀즈 목사님을 도와서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불타는 제너럴 셔먼호를 목격했던 11세 소년 최치량은 받은 성경이 금서였기 때문에 그 당시 평양 영문주사 박영식에게 전해 주었는데, 박영식은 여관을 운영하면서 그 성경을 뜯으며 종이 질이 좋다며 벽에 도배했는데, 누워서 그 성경을 본 사람들마다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분도 예수를 믿고 그 집터에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세워지고 이 교회가 나중에 이 예배당이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중심인 ‘장대현교회’가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어린 소년이었던 최치량 역시 기독교인이 되어서 ‘오촌리교회’를 세우고 ‘경신학교’를 설립해서 평생을 교육과 선교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이 한 사람의 순교의 피로, 그가 젊은 날에 세상을 떠났지만, 많은 열매가 맺혀져서 오늘날 이렇게 대한민국이 아시아 최대의 기독교 국가로 변화된 것입니다.
한평생 십자가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찬송가 135장, 갈보리산 위에>
1절 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험한 십자가를 내가 사랑함은 주가 보혈을 흘림일세
후렴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2절 멸시함을 받은 주의 십자가에 나의 마음이 끌리도다
귀한 어린양이 영광 다 버리고 험한 십자가 지셨도다
3절 험한 십자가에 주가 흘린 피를 믿는 맘으로 바라보니
나를 용서하고 내 죄 사하시려 주가 흘리신 보혈일세
4절 주가 예비하신 나의 본향집에 나를 부르실 그날까지
험한 십자가를 항상 달게 지고 내가 죽도록 충성하리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어린 나귀와 같은 저희들을 주님이 택하셔서 우리 위에 타시고, 하나님의 뜻을 펼치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어리석어서 내가 잘되면 내가 잘나서 잘 된 줄 알고 착각했던 나의 고집과 교만을 용서하여 주시고, 수시로 마음이 변해서 교회와 멀어지고 주님과 멀어졌던 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무리와 같은 그 모습을 주님 용서하여 주시고, 남은 여생 죽도록 충성하여 하늘나라 큰 상급 받는 저희 모두가 되도록 주님 은혜 내려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2천 년 전에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여 드리는 참으로 뜻깊은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모든 백성이 나와서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겉옷을 펴서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종려나무 가지를 펴고 그렇게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오늘부터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이 시작됩니다. 이 한 주간을 ‘고난 주간’, ‘수난 주간’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이 얼마나 중요한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복음서의 약 30%가 마지막 일주일간의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33년 반 동안 사셨는데, 3년 반 동안 공생애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일주일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사복음서의 3분의 1 가까이, 그리고 마가복음하고 요한복음의 약 40%가 마지막 1주간의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주일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월요일에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에 모든 장사하는 사람을 내쫓으시며, 성전을 정결케 하셨습니다.
화요일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종교 지도자들과 많은 논쟁을 하십니다. 수요일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일 공모를 하고, 예수님은 기도와 명상으로 십자가 고난을 준비하셨습니다.
목요일,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최후의 만찬을 하신 후에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시다가 금요일이 되었을 때 한밤중에 가룟 유다가 군인들을 이끌고 와서 예수님을 붙잡아 당시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 안나스에게로 데려가고, 그다음 가야바 대제사장에게 가서 심문을 받고, 실제적인 모든 권한을 쥐고 있는 빌라도 총독에게 갔다가 다시 헤롯왕에게 가서 심문을 당하고, 다시 빌라도 총독에게 와서 최종 사형 판결을 받습니다.
이 모든 것이 새벽 3시부터 6시까지 적법한 절차 없이 불법 재판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사형 선고를 받으시고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사, 오후 3시에 운명하십니다.
토요일, 안식일에는 무덤에 쉬고 계시다가 주일 새벽에 주님은 부활하십니다. 이 한 주간은 예수님의 고난을 깊이 생각하는 뜻깊은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2천여 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은 주님의 그 겸손하신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왕처럼 당당하게 말을 타고 앞뒤에 호위 군사를 이끌고 들어오신 것이 아니라, 어린 나귀 새끼를 택하여 그 나귀 새끼를 타시고, 겸손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1. 나귀 새끼를 택하신 예수님
만왕의 왕 되신 예수님께서 가장 겸손하고 낮아진 모습으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 예루살렘 입성에 대한 예언은 약 500년 전에 스가랴 선지자가 이미 예수님의 이와 같은 예루살렘 입성을 예언해 기록해 놓았습니다.
스가랴 9장 9절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왕들은 자기의 위엄과 권세를 나타내기 위해서 출정을 나갔다가 돌아올 때 말을 타고 들어오면서 대행렬이 앞뒤로 호위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백마, 흰말을 타고 들어왔습니다. 그 어디에도 왕이 나귀를 탔다고 하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 되신 예수님께서 가장 평범하고 초라하신 모습으로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왜 예수님은 나귀를 타셨을까요? 나귀는 평범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의 짐을 나르고 또 사람들을 태우고 다니는 일상생활의 수단이었습니다.
나귀는 평화의 상징이요, 겸손의 상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힘없고 평범한 존재인 나귀 새끼를 택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진 자, 힘 있는 자의 편이 아니라 언제나 평범한 자, 약자의 편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평범하고 힘없는 나귀 같은 우리를 택하셔서 하나님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나갈 때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을 때, 내가 잘나서 그렇게 사람들에게 박수갈채를 받는 것이 아니라, 나를 타고 계신 예수님 때문에 박수갈채를 받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잘 되면 착각합니다. 다 자기가 잘나서 그렇게 된 줄 아는데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우리가 잘 될수록, 높은 자리에 올라갈수록, 권력을 쥐고 힘을 휘두를수록, 더 겸손히 낮아져 약자를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그냥 무기력하고 연약한 나귀 새끼 같은 존재입니다. 그 나귀 새끼 자체로는 무엇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내고 겉옷을 깔고, 그리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환영한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받는 칭찬, 예수님 때문에 받는 그러한 영광스러운 모습을 내 것으로 착각하고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한평생 주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으려면 우리는 늘 나귀처럼 겸손히 주님을 잘 모시고, 주님의 역사를 이루어야 합니다. 겸손은 예수님 모습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께 쓰임을 받으려면 예수님을 본받아서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1장 29절에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 말씀을 바꿔 말하면 너희 마음에 쉼이 없고 평안함이 없는 것은 너희가 겸손하고 온유하지 못해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왜? 내가 잘나서, 강한 성격으로 내 고집, 내 주장을 하다 보니까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입니다.
강한 성격과 교만한 모습은 내 주변에서 사람이 떠나게 하지만, 온유하고 겸손한 모습은 내 주변에 사람이 몰려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겸손과 온유의 사람이 되어서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주님의 귀한 일꾼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예수님을 환영한 무리들
우리가 오늘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의 모습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로마의 압제하에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로마는 통치하는 모든 나라에 군사를 보내 많은 세금을 거둬들였습니다. 또 로마 정권에 아부하는 세금 걷는 세관원들은 덧붙여서 중간에 착복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로마로부터 해방될까?’ 저들의 마음속에 간절한 해방에 대한 꿈이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니까 메시아가 와서 우리를 해방시켜준다는데, 그 메시아가 누군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말을 듣고, “예수님이 그러면 우리를 로마에서 구원해 줄 왕이시겠구나.” 그래서 열렬히 예수님을 환영했습니다.
마태복음 21장 8절에 보니까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1) 겉옷을 길에 편 백성들
저들이 겉옷을 길에 폈습니다. 고대 사회에 자기 옷을 땅에 펴는 행위는 자신의 권리와 지위를 내려놓고 상대방에게 복종과 충성을 다짐하는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모신다는 그러한 저들의 충성된 모습으로, 복종의 모습으로 겉옷을 펴서 깔았던 것입니다. 구약시대 예후가 왕이 될 때 이와 같은 기록이 나옵니다.
열왕기하 9장 13절입니다.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가져다가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이르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예수님을 왕처럼 모시며 저들은 옷을 깔고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2)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폄
나아가서 저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그 가지를 길에 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당시 유대 나라에 있어서 승리의 상징이요 해방의 상징이었습니다. “로마를 무너뜨릴 메시아가 오셨다!” 그 뜻을 담아서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편 것입니다.
(3)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침
그리고 그들은 나가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를 외쳤습니다.
마태복음 21장 9절입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호산나’라는 말은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를 로마 제국에서 구원해 주옵소서! 저들이 간절히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호산나는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한 기도요, 간구였습니다.
시편 118편 25절입니다.
“야훼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야훼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저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을 외쳤는데, 다윗의 자손은 메시아를 상징하는 칭호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에게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 다윗의 왕권을 회복할 메시아여!”하고 저들이 외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열렬히 예수님을 환영했던 무리가 닷새 만에 마음이 싹 돌변합니다. 저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오셔서 백성들을 선동해, 무장 봉기해서 혁명을 일으키고, 로마 제국을 대항해 싸울 줄 알았는데, 도리어 성전에 와서 장사꾼을 내쫓으시고, 성전에 가서 장차 말세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언제 마지막 때가 올지 모르니까 준비하라”고 하는 이해되지 않는 말씀만 전하시고, 종교 지도자들과 논쟁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저들의 마음이 싹 돌아섰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로마에서 구원해 줄 메시아가 아니야.’ 그래서 닷새 만에 마음이 완전히 돌변해, 그 예수님을 환영했던 군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못 박으소서”라고 외친 성난 군중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마가복음 15장 6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더니 무리가 나아가서 전례대로 하여 주기를 요구한대 빌라도가 또 대답하여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 하는 이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시 소리 지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하니 더욱 소리 지르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무리가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가 은혜받을 때는 눈물 콧물 쏟으면서 ‘내가 죽도록 주님을 위해서 충성 헌신하겠습니다.’라고 다짐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교회 일에 참여해서 그저 교회 일이라면 너무나 기쁘고 감사해서 앞장서서 일을 하고, 열심히 주님 앞에 헌물을 드리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고, 나가서 전도하고 하다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사람들이 날 알아주지 않고, 뭔가 내 뜻대로 안 되면 ‘섭섭이’라는 귀신이 들어와 혼자 시험에 듭니다.
그렇게 열심히 주님을 섬기고, 그냥 예배를 드릴 때마다 찬송을 불러도 기쁘고, 말씀을 들어도 기쁘고, 기도해도 감사해서 눈물이 났는데 눈물은 싹 말라 버리고, 마음이 굳어져서 마음에 기쁨이 사라지고, 감사가 사라지고, 사소한 일에 원망, 불평하고, 남을 비판하고 있다면 이 무리와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다음에 다가온 현상이 무엇이냐? 예배에 대한 감격이 사라집니다. 예배의 주인은 예수님이신데, 예수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마음이 돌아선 무리와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주님 용서하여 주옵소서. 첫사랑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내가 나 혼자 시험에 들어서 불편해하고, 감사가 사라지고, 기쁨이 사라지고, 그래서 남을 비판하고 있고, 불평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다시 첫사랑을 회복할 수 있도록 주님 은혜 내려주옵소서.”
요한계시록에 예수님께서 에베소교회를 책망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4절, 5절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켜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첫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님! 내가 첫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눈물이 메말랐습니다. 감사가 메말랐습니다. 내가 조금씩 불평하게 되고,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지 않고, 내가 무시당하면 혼자 섭섭해서 시험에 들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나 혼자 불평하며 살았던 내 모습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여러분, 다시 첫사랑을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사랑의 감격을 갖고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일생을 함께하시며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 첫사랑의 감격으로 선교사가 되어서 한국 최초의 순교자가 된 토마스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영국 웨일스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목회자의 가정에서 선교 비전을 꿈꾸며, 어머니의 기도 속에 자랐습니다.
1859년 런던대학교 뉴칼리지에서 신학 과정을 마치고, 1863년 목사 안수를 받은 그해 7월에 24살의 나이에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아내 캐롤라인 고드프리와 함께 중국 상하이로 향합니다. 몇 달 걸려 상해에 도착했는데 부인이 풍토병에 걸렸습니다. 당시 아이를 임신한 상태라 심한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선교사가 아내를 돌볼 수 있는 선교지를 찾으러 간 동안에 그만 아내가 유산했습니다. 급히 자기에게 메시지가 전해져 왔는데 ‘나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아내의 편지를 받고 선교지로 돌아갔지만, 아내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습니다.
20대 초반에 꽃다운 나이에 남편을 따라 중국 선교를 왔다가 아이를 잃고, 자신도 목숨을 잃게 된 것입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너무나 충격이 컸습니다. 그때 그를 파송한 런던선교회에 보낸 편지의 내용입니다.
“저는 지금 감당할 수 없는 슬픔으로 인하여 제 마음을 걷잡기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그녀의 평화롭고 고통 없는 죽음에 대하여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주신 자도 야훼시오, 취하신 자도 야훼시니 야훼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라. 1864년 4월 5일.”
아내를 잃은 슬픔 가운데 잠시 선교사역을 멈췄는데,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소속 알렉산더 윌리엄슨 목사님이 지금 조선에 복음을 듣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절망 가운데 살고 있다고 조선의 선교사로 가라고 권면합니다. 그때 그는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저는 그동안 제 믿음이 좋아서 이곳 중국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게 된 줄 알았는데 캐롤라인의 죽음 앞에서 사정없이 흔들리는 제 약한 모습을 보면서 제가 참으로 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선교는 자식을 무덤에 묻는 아픔 없이는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셨던 분들의 이야기가 실감이 납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잠시도 제 스스로 설 수 없는 자란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래서 1865년, 그는 조선의 첫 선교사로 와서 황해도 장연(백령도)지역에서 3개월 동안 머물면서 한국말을 배우며 성경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1866년 이듬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통역으로 승선해서 두 번째 조선을 향해 옵니다.
당시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펼쳐 조선에 오는 외지인들을 적으로 여겼기에 배가 대동강으로 들어오자 배를 공격했습니다. 배가 대동강 중간의 섬에 걸리게 되니까 위에서 조선 수군들이 조그만 조각배에 불을 붙여 내려보내 배가 불타게 됐습니다.
불길에 휩싸여 있는 그 순간에도 “예수! 예수! 예수!”를 외치면서 그 앞에서 뛰어내려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 앞에 성경을 주며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주여, 이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니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 복음이 이 땅에 열매 맺게 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1866년 9월 2일, 27살의 젊은 나이로 대동강의 백사장에서 순교합니다. 제가 평양에 심장병원을 지으러 가서 평양 지도를 사보았습니다. 그 지도에 토마스 선교사가 순교한 그 자리를 ‘선교강안거리’라고 표시해 놨고, 그 지역 전체가 ‘선교구(區)’로 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북한 사람들이 선교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고 쓰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마포구, 동대문구는 있어도 선교구는 없거든요. 근데 북한의 평양에는 ‘선교구’가 있습니다. 언제고 북한의 문이 열리면 우리가 그 순교자의 자리에 가서 우리가 예배드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날이 다가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를 찔러 죽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박춘권은 그에게 던져준 성경을 가지고 와서 예수를 믿은 다음 ‘안주교회’ 영수가 되고 그 가족들이 평양에서 신앙 명문가를 이루고, 조카 이영태도 ‘평양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후에 성서번역의 주역인 레이놀즈 목사님을 도와서 성경을 번역했습니다.
그리고 불타는 제너럴 셔먼호를 목격했던 11세 소년 최치량은 받은 성경이 금서였기 때문에 그 당시 평양 영문주사 박영식에게 전해 주었는데, 박영식은 여관을 운영하면서 그 성경을 뜯으며 종이 질이 좋다며 벽에 도배했는데, 누워서 그 성경을 본 사람들마다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분도 예수를 믿고 그 집터에 평양 최초의 교회인 ‘널다리골 예배당’이 세워지고 이 교회가 나중에 이 예배당이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중심인 ‘장대현교회’가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어린 소년이었던 최치량 역시 기독교인이 되어서 ‘오촌리교회’를 세우고 ‘경신학교’를 설립해서 평생을 교육과 선교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이 한 사람의 순교의 피로, 그가 젊은 날에 세상을 떠났지만, 많은 열매가 맺혀져서 오늘날 이렇게 대한민국이 아시아 최대의 기독교 국가로 변화된 것입니다.
한평생 십자가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축원합니다.
<찬송가 135장, 갈보리산 위에>
1절 갈보리산 위에 십자가 섰으니 주가 고난을 당한 표라
험한 십자가를 내가 사랑함은 주가 보혈을 흘림일세
후렴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 사랑하리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들겠네
2절 멸시함을 받은 주의 십자가에 나의 마음이 끌리도다
귀한 어린양이 영광 다 버리고 험한 십자가 지셨도다
3절 험한 십자가에 주가 흘린 피를 믿는 맘으로 바라보니
나를 용서하고 내 죄 사하시려 주가 흘리신 보혈일세
4절 주가 예비하신 나의 본향집에 나를 부르실 그날까지
험한 십자가를 항상 달게 지고 내가 죽도록 충성하리
<기도>
사랑과 은혜와 자비가 무한하신 하나님 아버지. 어린 나귀와 같은 저희들을 주님이 택하셔서 우리 위에 타시고, 하나님의 뜻을 펼치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어리석어서 내가 잘되면 내가 잘나서 잘 된 줄 알고 착각했던 나의 고집과 교만을 용서하여 주시고, 수시로 마음이 변해서 교회와 멀어지고 주님과 멀어졌던 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무리와 같은 그 모습을 주님 용서하여 주시고, 남은 여생 죽도록 충성하여 하늘나라 큰 상급 받는 저희 모두가 되도록 주님 은혜 내려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순복음가족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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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으로의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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