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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27. 초대교회의 삼위일체적 침례가 완성되기까지 - II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인류와 이스라엘의 역사가 기록된 역사책이다. 성경 한 구절은 한 개의 구절 이상의 의미와 역사·정치·문화·사회적 배경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에 기록된 사건과 구절들을 넓은 시야로 혹은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세세하게 접근함으로써 성경 전체를 조금 더 잘 이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순복음가족신문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기록한 성경구절의 행간을 풀어 성도들이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사건과 역사로 읽는 성경 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삼위일체적' 침례는 그리스도의 명령이자 교회의 사명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려 하시니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침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마 3:13~15)

종교적 의식은 오랜 시간을 통해 역사와 전통을 쌓으며 형성되고 변형되어 왔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베푸는 '삼위일체적'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으로서 교회가 존재하는 한 계속 이루어야 할 사명이다(마 28:19). 굳이 침례 앞에 '삼위일체적'이라는 말을 덧붙인 이유는 최소한 3가지 종류의 침례가 공존하는 시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1세기 중반에 해당하며 초대 교회가 걸음마 단계였던 시대이다. 적어도 마태복음이 기록되기 이전이라 할 수 있다.

케리그마 요소가 강화된 '예수의 이름'으로 베푼 침례는 삼위일체적 침례가 공식화될 때까지 사도들에 의해 폭넓게 받아들여졌다. 사도들은 요한의 '죄 사함의 침례'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침례를 엄격히 구분했으며, 죄 사함의 침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다시 침례를 베풀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베푸는 삼위일체적 침례(마 28:19)는 사도행전과 바울의 서신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사복음서에도 오직 마태복음에만 나오고 있는데 서신서와 사도행전이 기록될 당시까지만 해도 삼위일체적 침례가 원시 기독교 교회에서 실행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의 강림 이후 제자들은 성령 침례를 강조하게 되었고, 성령 체험은 그리스도의 명령인 삼위일체적 침례를 실현하는 촉매의 역할을 했다.


1. 요한의 침례 VS 초대 교회의 침례

지난 호에서 언급한 것처럼 요한의 침례와 초대 교회의 삼위일체적 침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요한은 요단 강가에서 쿰란 공동체와는 다른 죄 사함의 침례를 베풀고 있었으며 예수님의 제자들과 초대 교회의 침례가 형성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신학적으로 요한의 침례와 초대 교회의 침례는 큰 차이를 보인다. 초대 교회는 요한의 모호한 죄 사함의 침례를 '예수의 이름으로' 대체하면서 요한의 '죄 사함'의 의미를 소멸시키거나 약화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죄를 씻기 위한 침례가 아니라 구원을 위한 침례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구원의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예수의 이름이 구원의 능력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1)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는 침례

초대 교회의 침례 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침례의 수여자가 회중 앞에서 "예수는 주님이시다"(롬 10:9; 고전 12:3)라는 신앙의 고백과 함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6세기에 기록된 사본에 따르면, 빌립이 에디오피아의 내시에게 침례를 주기 전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게 했다.

침례 요한은 그의 뒤를 이어 오실 그리스도께서 베푸실 성령 침례를 소개함으로써 자신이 메시야가 아닌 것(요 1:20; 3:28)과 자신의 침례의 한계성을 분명히 했다(마 3:11). 초대 교회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줌으로써 요한의 침례와 차별을 두었을 뿐만 아니라 '죄 사함'을 위한 요한의 침례가 구원의 문제까지 접근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원시 기독교 교회는 처음부터 요한의 물 침례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침례와 성령 침례까지 모두 받아들이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이 복음을 듣고 침례를 받았으며(행 2:41), 베드로, 빌립, 바울, 아볼로를 포함한 대부분의 제자와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었다(행 8:12, 38; 10:48; 16:15, 33; 19:5; 고전 1:14~16). 죄 사함만을 위한 요한의 침례와 다르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침례는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고 교회 공동체로 들어오는 것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행 2:41).


 2) 공동체와 연합을 이루는 침례

그리스도와 연합된 공동체의 정체성은 같은 신앙의 고백과 의식을 통해서 드러난다. 이런 의미에서 초대 교회의 신앙적인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냈던 것이 침례이다. 유대 공동체가 율법이나 아브라함의 혈통에 의해 구성원이 정해졌다면 초대 교회는 침례를 통해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들의 구성원을 받아들였다.

예수의 이름으로 베푼 침례를 통해 예수에게 속하고(고전 1:10~17),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롬 10:9), 어둠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했다(골 1:13). 율법과 할례의 차별성과 달리 침례는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기준이었으며, 혈육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인하는 절차이기도 했다. 침례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가 혈통이나 지역에 의해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우주적인 개념이라는 것과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주어진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것은 바울의 침례에 대한 이해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바울은 누가 침례를 주었느냐가 아니라 침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지에 관심을 두고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롬 6:3)들은 교회 공동체와도 연합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2. 종말론적·예언적 선포로서 삼위일체적 침례


성령침례는 마지막 날에 남종과 여종, 노인과 아이들에게까지 부어질 종말론적 주제 중의 하나이며 예언적 선포이다(욜 2:28~29). 오순절 성령의 강림 후 예수의 제자들과 사도들의 관심은 물 침례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요한의 침례와 초기 원시 기독교의 침례는 처음부터 죄 사함과 관련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면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었으며 침례를 받는 근본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누가는 성령 침례를 통해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영적인 변화를 기술하고 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 초대 교회의 관심은 점차 물 침례에서 성령 침례로 대체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행 1:5).

초대 교회의 성령까지 포함한 삼위일체적 침례 또한 사도행전 1장 5절의 성령 강림의 예언적 선포가 사도행전 2장 1절의 종말론적 성취와 함께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만약 성령 침례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초대 교회 성도들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베푸는 삼위일체적 침례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물 침례가 더 이상 필요 없다거나 성령침례로 인해 물 침례의 기능이 상실됐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교회에 남긴 "요한은 물로 침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행  1:5)는 명령을 초대 교회가 지켜야 할 종말론적, 예언적 선포로 인식하고 있다.

마태 또한 교회가 지속적으로 성취해 나가야 할 종말론적, 예언적 선포로서 삼위일체적 침례를 그의 복음서 가장 마지막 부분에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으로 배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초대 교회가 침례의 신조로 받아들인 마태의 삼위일체적 침례를 원시 기독교 교회에서 이루어졌던 다른 침례들과 모순 관계에서 이해하기보다는 선교적, 예언적 선포로 이해되어야 한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삼위일체적 침례를 그리스도의 명령과 교회의 사명으로 인식하고 교회가 속한 모든 나라와 족속, 백성과 방언 가운데서 지켜 행해야 할 것이다.

이상윤 목사(홍콩순복음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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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1.04.04. am 09:58 (편집)
이상윤 목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