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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요 8:1~11)


1.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예수님께서 아침 일찍이 감람산에서 내려오사 성전에 들어가서 말씀을 전파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한 여인을 잡아서 끌고 들어오는데, 고함 소리, 욕하는 소리 그리고 여인의 울음소리가 순식간에 정적을 깨뜨렸습니다.

군중들이 길을 비키는데, 그 사이로 한 여자가 질질 끌려 들어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이 여인을 예수님의 발 앞에 내동댕이치고 난 다음에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요 8:4~5)

그 사람들은 예수님을 올무에 잡아넣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니 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별도리 없이 “돌로 치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그 많은 군중이 보는 앞에서 허리를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내용을 썼다고는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지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율법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아마도 예수님은 그 자리에 십계명을 적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계속해서 압력을 가합니다. “선생이여! 빨리 심판하소서. 당신은 이 여자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큰 자로부터 작은 자까지 눈을 마주쳐 꿰뚫을 듯이 보시고 난 다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그러고 난 다음, 주님께서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는데, 사람들이 그 어깨너머로 그것을 보고 얼굴이 샛노래지니, 한 사람, 두 사람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남몰래 지은 죄악을 주님이 다 알고 계시는 것을 깨닫고, 성경에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들이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실까지도 예수님이 다 알고 있는 것을 알고 한사람 두 사람 돌을 슬며시 내던져놓고 뒤로 빠져나갔습니다.

왜냐하면 그 여자를 돌로 치라고 하는 그 말을 듣자, 자기들이 그 여자 입장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여자는 눈에 보이는 죄를 지었고, 자기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죄를 갖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돌로써 그 여자를 친다면, 그 돌로써 자기를 쳐야지 공정하게 해야 되니까, 그래서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그들이 여자를 때리지 못하고 피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평가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의롭고 거룩하다고 자랑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죄인입니다.

이 세상에 아담과 하와의 혈통을 통해서 태어난 사람치고 행위로 의롭다 함을 입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위대한 사도 바울 같은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탄식을 했습니다. 로마서 7장 22절로 24절에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탄식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탄식과 고백은 또한 오늘날 우리의 탄식과 고백입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그 마음의 문을 열어 놓았을 때, 바울 선생과 같은 탄식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죄의 대가는 사망이며,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내가 온 것은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요 12:47)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짓고 불의하고 추악하고 마귀의 자식이 되어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오늘날도 죄인들을 심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왔다고 생각하나 예수님은 죄인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이 예수님의 친구였습니다. 삭개오가 사람들이 다 미워하는 세금쟁이었지만은, 예수님을 보려고 있던 삭개오를 “삭개오야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들어가서 같이 위로하겠다.” 죄인의 집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라고, “왜 죄인의 집에 들어가느냐”고.

여러분, 의사들은 환자가 없으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죄인을 불러 구원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이 있는 곳엔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 아니고는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 다른 것은 우리는 “내가 너를 용서한다”고 말할순 있지만은, 예수님은 그 말의 책임을 짊어지고 그 죄를 자기가 덮어쓰고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음의 죄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성전에서 다 떠나고 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아직 엎드려서 울고 있는 그 여자를 보고, “여자야 고개를 들어라. 너의 주위를 살펴보라.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느냐.”, “없나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 예수님은 정죄치 아니하였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온갖 욕을 다하고 정죄를 하는데, 예수님은 정죄하지 위해서 오시지 아니하였습니다. 구원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를 구원하기 위해 왔기 때문에, 정죄 안 하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이것이 격려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러고 사두개인, 바리새교인에게도 “너희가 죄 없는 자가 돌로 먼저 쳐라”하는 것도 죄인인 것을 서로 깨닫게 하는 사역을 예수님이 베푼 것입니다. 예수님을 죄를 깨닫게 해주시고, 회개하게 해주시고,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여자가 예수님의 말을 듣고 일어나서 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자기가 울고 쓰러져있던 그 주위에 돌멩이가 쌓여있고 거기에 예수님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여러분이 지은 죄 예수님이 용서를 해주고, 여러분이 떠나오면서 뒤를 돌아보면, 예수님이 여러분의 죄 한 가운데 여러분의 죄를 덮어쓰고 서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인하여서 죽어야 했는데,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로 인함이요 우리의 지은 죄로 인하여 주가 상함을 얻었고, 주님이 고난을 통해서 우리에게 평안을 주심으로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를 낫게 하신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야훼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5~6)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다 짊어져서, 하나도 없이 죄를 짊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움을 받은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몸을 찢고 피를 흘리고 달려서 고통을 당할 때, 주님이 얼마나 아팠기에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아버지여, 아버지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처럼 큰 고통을 당하고, “내가 다 이루었다.” 여러분과 나의 죄를 다 청산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날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 오지 아니하시고 용서하여 구원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평생을 죄인을 찾아다녔습니다. 의인을 찾아 같이 가려고 한 것이 아니라, 죄인을 발견해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나가는 것 같이 불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한 젊은 부자가 예수님께 와서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습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주님께서 “율법을 지키라”고 하시니, “하하, 무슨 율법을 말입니까?”, “모세가 전해준 율법을 지켜라.”, “그건 내가 어릴 때부터 다 지켰습니다. 무엇이 더 부족합니까?”, “네가 부자인데, 가난한 사람이 많다. 그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면 구원을 받는다.” 이 청년이 ‘별난 사람 다 봤네. 그렇게 하란다고 해서 내가 할 줄 아냐.’ 그러고 떠나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자기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의로운 일을 했다고 해도, 하나님 눈으로 보면 죄인 덩어리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것을 여러분은 꼭 잊지 말고 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의로운 행동을 해서 구원을 받는다면, 앉아있는 여러분, 서 있는 저, 구원받을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 죄악 덩어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피가 속죄의 피가 되어서 우리를 청산해주신 것입니다.

그러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믿음이 있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믿음이 적어서 구원을 못 받는다”라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믿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안 믿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으면 이 산더러 명하여 바다에 던지라해도 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수 만 명의 군중이 유대광야로 나와서 배가 고파서 허덕입니다. 예수님이 빌립을 불러서 “빌립아, 저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아이고 주님, 무슨 말씀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 군중이 남자만 오천 명, 여자를 합치면 만 명이 넘을 것인데, 조금씩 주더라도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돈이 있어야 됩니다. 못 먹입니다.” 아예 딱 거부해버렸습니다.

그런데 안드레는 보리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가지고 나온 안드레는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 “주님 이 많은 사람에게 이렇게 적은 것이 무엇을 하겠냐만은, 난 주님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 하고 가지고 나왔습니다.” 만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보리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가지고 어떻게 합니까. 그러나 안드레는 빌립과 다른 것은, 빌립은 아예 믿음을 거부했지만 안드레는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지고 왔습니다.

태산처럼 불신앙이 있지만 그 불신앙 밑에 그 믿음이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살아있는 믿음이니까 자랍니다. 하나님은 이 겨자씨만한 믿음을 받아가지고서 오천명을 먹이고 열두 바구니를 남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나는 믿음이 없습니다’라고 탄식할 때,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안 믿으려는 것입니다. 믿으려고하면 겨자씨만한 믿음은 다 있습니다. 그 터무니없는 겨자씨만한 믿음이 우리에게 무엇을 하겠느냐? 믿음이란 3차원의 에너지가 아니고 4차원의 에너지인 것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란 엄청난 힘인 것입니다.

그래서 겨자씨만한 믿음만 진실로 있으면 오늘날도 산이 무너지고 바닷물이 넘쳐나고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보고 말하기를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야훼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보라 내가 너를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로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을 겨 같이 만들 것이라”(사 41:14~15)라고 하셨습니다. \

여러분 어떻게 굼벵이가, 지렁이가, 이가 날카로운 타작기가 되는 것입니까. 지렁이는 꿈틀거리고 새가 오면 잡아 먹혀 버리고, 짐승들의 발에 밟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꿈틀거리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이 있으면 하나님이 그 생명을 살려서 이가 날카로운 타작기로 만들어서 어마어마한 힘으로써 타작을 해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렁이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지렁이가 되면 자연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지렁이가 안 되니까 탈이지, 지렁이가 되면 하나님께 의지하면 하나님이 지렁이를 변화시켜서 타작기계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내가 이 교회를 지을 때, 저 교회 구석에 철골만 올라가있고, 비가 와서 녹물이 떨어지고, 얼마 안 있으면 철골을 다 해체 해야된다고 건축가가 말을 합니다. 돈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엎드려서 기도하며 “하나님이여, 나는 못난이입니다. 지혜도 없고, 지식도 없고 돈도 없고, 없는 것밖에 없는 이 자식이 교회를 짓겠다고 나온 것은 오만한 일입니다. 나를 죽여 주십시오” 제가 그래서 울고 가슴을 치니깐 내 가슴 속에서 음성이 들어옵니다.

‘듣기 싫다. 네가 못나고 무식하고 힘이 없고 아주 그런 주의 종인것을 내가 알고 있다. 너는 그런 사람이어도 나는 하나님이다. 나는 하늘과 땅을 지었고, 내가 못 하는것이 없다. 네가 못났으면 내가 너를 운전해서 불가능이 없는 것을 보여주겠다. 네가 못났다고 하는 것은 참말이다. 못난 놈이다. 그러나 못난 놈이라도 너의 속에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랐습니다.

‘그렇다. 내가 못난 놈이지만 나는 하나님을 모시고 있으니깐 하나님이 일을 할 수 있다.’ “일을 행하시는 야훼,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야훼, 그의 이름을 야훼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2~3) 큰 용기와 힘을 얻고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가니깐, 그 뒤에는 기적이 따르고, 크고 위대한 일을 이루어주시는 교회를 지을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못났어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못난 사람은 희망이 있습니다. 자기를 보고 못난 것 있다고 하면 희망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 없는 못난 사람은 절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있는데 못난 사람은 하나님을 모시면 변화된 새 타작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서 모든 것을 예비해놓았으며,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인생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좌우에 강도가 심판을 받아서 못 박혀 같이 고통을 당하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한쪽 강도는 예수님을 쳐다보고 욕을 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서, 너와 나 우리를 다 구출해라.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해라. 이 자식아.” 이렇게 막 욕을 해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편의 강도는 “야, 이 자식아, 너와 나는 정당하게 심판을 받고 우리 지은 죄 값으로 십자가에 달렸지만, 여기 이는 죄를 지은 적이 없다. 그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 친구가 되어서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살아왔는데 이분을 그렇게 욕해서 되겠느냐. 주여, 주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해주소서.” 이 한 마디가 자기 인생에 처음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 곧장 대답하기를,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한 생을 죄악을 짓고 흉악한 강도로서 살았던 사람이 말 한마디에 낙원에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그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그보고 “저 자식, 헛된 소리를 한다”지만, 예수님은 그 사람 속에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을 예수님이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겨자씨만한 믿음을 자기 인생에 연결 시켜서 그 사람 죄를 다 받아서 그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순간에 청산하고 구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구원이 얼마나 위대한지 형언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를 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한 젊은 청년이 내게 와서 “목사님 나도 목사가 되고 싶은데, 목사 솔직히 되지를 못 합니다. 내 속으로는 목사가 되고 싶은 소명감이 있어요. 막 복음을 전하고 싶지만 내 겉사람이 술 먹고 담배 피우고, 오만한 행동을 하고, 음란하고, 죄 덩어리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죄 덩어리가 어떻게 나보다 의로운 사람들이 가득 있는 교회당에서 복음을 전합니까? 이율배반적인 일 아닙니까? 그래서 나는 신학교를 못 갑니다.”

내가 그 말을 듣고 화들짝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 사람아, 너 같은 사람만 있으면 나는 오늘 쫓겨난다.”, “목사님이 왜 쫓겨납니까? 목사님 설교 들어보면 천사같이 살고 계시는데.”, “네가 나를 천사같이 살고 있다고 보고 있는데 나는 악마 같은 일을 하고 사는 사람이다. 나는 너같이 의로운 사람 앞에 설 수가 없다.” 정말 그 사람 말할 때 꼭 내가 꼭 목사가 되는 게 진짜인가 가짜인가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 청년이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인데 왜 저가 목사가 안 되고 내가 목사가 되었습니까? 저는 자기가 죄인인 줄 알고 깨닫고 그 죄와 싸우고 있는데, 나는 저 사람보다 나쁜 것은, 위선자이기 때문에, 죄가 없는 사람처럼 설교하나 실제로는 죄인인데 어떻게 내가 목사가 되었습니까.’

그러자 하나님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나 그나 똑같은 죄인이다. 아담과 하와의 자식치고 죄 안지은 자식이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로 들려야 하리니 인자를 바라보는 사람마다 뱀이 변해 천사가 된다.’ 뱀은 큰 뱀도 뱀이고, 적은 뱀도 뱀입니다.

우리는 다 뱀이에요. 그 뱀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공로로 말미암아 변화되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입니다.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 자신을 보지 말고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실낱같은 믿음, 겨자씨 믿음, 그 믿음이 태산을 옮기는 변화의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큰 믿음이 눈에 안 보인다고 못 쓰는 것이 아닙니다. 꿈틀거리는 벌레 한 마리가 주님 손에 얹혀지면 타작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빌립같이 자기와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 봐야 돼요. 잘못 보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 때문에 구원받고, 예수님 때문에 주의 종이 되고, 예수님 때문에 선교하고, 예수예수, 주 예수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나는 오랜 세월 동안 설교했지만 입을 막고 하는 설교는 처음입니다. 이렇게 마스크를 하고 설교했습니다. 아멘도 안 하고, 할렐루야도 안 하고, 끝을 바라보면 다 이 설교에 반응을 안 하니깐 설교를 무시한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실제로 쳐다보면 아주 성실하게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가진 그 믿음을 보십시오. 여러분 하나님을 통해서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세상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보면 낙심할지라도, 하나님을 보면 기고만장할 수 있습니다.

어떤 여행객이 대한민국에 들어와서 나를 만나자 “선생, 대한민국은 다 공동묘지같다.” 내가 깜짝 놀랐습니다. “왜 대한민국이 공동묘지냐?” 비행기를 타고 오니까 교회당이 얼마나 많은지 십자가가 어디가도 십자가가 있어요. 서양사람들은 십자가를 공동묘지에 주로 세우고 보통 십자가를 그렇게 세우지 않거든요. 그래서 큰 공동묘지 같답니다.

그래서 내가 “당신들 공동묘지만 보니까 그렇지, 한국이 크게 희망이 있는 나라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못 박혀서 죄와 허물을 사하고 우리의 병과 고통을 치료하시고 저주를 사하시고 죽었다가 부활하신 은혜를 주는 오중복음을 주시는 곳이다. 우리는 십자가 밑에 들어가면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와 축복이 임한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그렇게 많이 세워진 우리 한국을 축복해 주신다.” 그 사람, 세월이 지나고 난 다음에 공동묘지를 바라본 그 사람이 공동묘지에 살까 싶습니다.

오중복음과 삼중축복을 바라보는 나는 축복을 받고 부활 승천해서 주님과 같이 살 것입니다. 무엇을 바라보느냐? 그게 중요합니다. 어떤 학교를 나왔느냐 그건 3차원의 세계에는 중요하지만 하나님은 그걸 중요하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하버드 대학 안 나왔습니다. 사도바울도 서울대학 안 나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대학을 나왔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내신 보혜사 구주 예수님, 보혜사 성령님, 한쪽은 움직이지 않는 원리의 예수 보혜사, 한쪽은 움직이고 창조하는 성령 보혜사, 예수님은 우리 태양입니다. 하나님은 야훼 우리의 태양인데, 야훼란 말은 스스로 있는 자입니다.

스스로 있는 자가 하나님, 스스로 있는 자가 오른팔은 예수님, 왼팔은 성령님, 그 두 팔을 가져서 이 우주를 창조하고 우리를 이끄는 것인데, 우리는 그 두 팔을 의지해서 이 세상에 타작 기계가 되어서 변화와 축복을 가져오는 그릇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기 도>

여러분 마음의 병과 육체의 병과 생활의 병을 다 치료받도록 아픈 데 손을 얹으십시오.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기도할 자격이 없으나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가슴속에 거하시며 그리스도께서 능력을 나타내시사, 병든 자를 고치시고 치료하여 주옵소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너 원수 마귀는 떠나갈지어다. 우리 개인에게서 떠나가고, 교회에서 떠나가고, 우리나라에서 떠나가고, 이 지구상에서 떠나갈지어다.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하나님 아버지, 주의 치료하는 성령이 운행하여 주옵소서.

온 땅이 허무하고 공허하고 흑암의 깊음 위에 있는 이런 현실에 하나님의 성령이 수면에 운행하셔서 “빛이 있으라! 지구가 창조되어라!” 아름다운 세계를 지어주셨습니다. 주님이여, 이런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셔서, 이 땅이 아름다운 보기에도 심히 고운 땅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기사입력 : 2020.03.01. am 12:59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