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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풀어 쓴 교회사 산책 - ⑬ 삼위일체 신앙의 형성(4)

교회사란 ‘그리스도교(기독교)의 역사’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 공동체의 역사라는 점에서 ‘교회의 역사’라고도 말한다. 긴 역사를 효과적으로 다루기 위해서 교회사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구분한다. 고대(초대)교회사, 중세교회사, 근대교회사, 여기에 종교개혁을 특별한 주제로 구별하여 종교개혁사를 포함시킬 수 있다(2018년 10월 14일자 ‘평신도를 위한 신학 강좌’를 참조). 각 시대마다 유구한 기독교 신앙의 가치를 깨닫게 해주는 주제들로 충만하다. 교회사 산책을 통해 각 시대마다 펼쳐지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향해 출발해보자.<편집자 주>

위기 속에서 비롯된 교회 일치의 노력

세르디카 공의회 직후의 상황
343년 세르디카(현재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서 일어난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분열 직후 서방교회 측은 한 무리의 사절단을 동방의 황제였던 콘스탄티우스(2세)에게 보냈다. 이들이 전달한 콘스탄스 황제의 편지는 아타나시우스를 복권할 것, 그렇지 않으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요구였다. 마침 동쪽 국경과 인접한 페르시아 제국과 잦은 마찰로 여력이 없던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막내 동생의 막무가내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346년 6월 아타나시우스는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아를 공의회(353년)와 밀라노 공의회(355년)
라이벌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기 시작하던 콘스탄스가 마그넨티우스에게 암살(350년)되면서 상황은 급반전되었다. 마그넨티우스를 제거(353년)한 콘스탄티우스는 제국을 통일한 뒤 곧바로 교회분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다(보고에 따르면 콘스탄티우스는 마그넨티우스와의 최후의 결전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고 교회에서 기도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황제처럼 일치된 신앙고백으로 제국의 연합을 도모하려 했다. 아를(현재 프랑스 남부의 한 도시)과 밀라노(현재 이탈리아 북부의 한 도시)에서 열린 공의회는 이러한 황제의 의지를 따라 아타나시우스와 그 일파들을 단죄했으며 황제는 공의회의 결정을 근거로 그들을 추방했다(356년).

시르미움 공의회(357년)
아타나시우스가 추방된 후 이듬해는 황제의 통치 2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에 즈음하여 시르미움(현재 세르비아의 한 도시)에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황실 주교 세 사람(발렌스, 우르자키우스, 게르미니우스)의 주도 아래 열린 공의회는 ‘제2차 시르미움 신앙고백’을 결의하면서 교회 분열의 상황을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공의회는 니케아주의자들이 강조하던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동일본질’은 물론 이와 비슷한 용어들을 모두 금지하기로 결의했다. “오직 성경에서 말하는 것만 유효하다”고 정의했지만 이러한 일련의 조치가 많은 사람에게는 성자와 성부의 종속적인 관계를 명확히 하려는 의도로 비쳤다. 어쨌든 ‘2차 시르미움 신앙고백’은 황제의 참석 하에 몇 차례 더 열린 공의회에서 조정된 후 최종적으로 ‘4차 시르미움 신앙고백’으로 결의되었다. 신앙고백의 핵심은 “성자는 성경에 따라 모든 것에서 성부와 유사하다”라는 것이었으며 이를 지지하는 세력을 가리켜 소위 ‘유사파’라고 일컫는다.

앙퀴라 공의회(358년)
시르미움에서 결의된 신앙고백에 즉각 반발한 것은 앙퀴라(현재 터키의 수도)의 주교였던 바질이었다. 당시 급진적인 아리우스주의자들이 결의한 신앙고백에 대해서도 대처해야 했던 그는 358년 부활절 직전 교회의 축성일에 즈음하여 공의회를 소집했다. 추운 계절이었기 때문에 12명의 주교만 참석한 자리에서 이들은 아리우스주의자들의 입장은 물론 니케아주의자들의 입장 모두를 거부하면서 처음으로 중용적인 입장(성자는 본질에 따라 성부와 유사하다)을 제시했다. 이들을 가리켜 소위 ‘유사본질파’라고 한다.
 처음에 바질은 황제를 설득하는데 성공했으나 그의 완고한 성격 때문에 점차 신임을 잃었고 ‘유사파’에게 주도권을 내주어야 했다.

리미니-셀레우키아 이중 공의회(359년)
359년 황제는 제국의 모든 주교들을 소집하여 시르미움 공의회의 결의를 받아들이도록 하려 했다. 다만 황제는 세르디카에서 있었던 불행한 일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서방과 동방에서 이중공의회를 열도록 하였다. 서방측 주교들은 359년 늦은 봄에 리미니(현재 이탈리아 북동부의 한 도시)에서, 동방측 주교들은 같은 해 가을에 셀레우키아(현재 터키 동남부의 한 도시)에서 공의회에 참석하도록 초대받았다. 불행하게도 양쪽 공의회 모두 시르미움 신앙고백을 거부했다. 교회의 일치가 결렬되자 황제는 크게 분노했고 결국 양측은 359년 마지막 날에 ‘니케’라는 도시에서 신앙고백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360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이 결정을 추인하였다.

알렉산드리아 공의회(362년)
사실 양측은 서로의 입장을 양해할 수 없었다. 동방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한 우시아(본질)”라는 주장은 마치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한 분(양태론)”이라는 의미로 여겨졌다. 반대로 서방교회에서 볼 때 아버지와 아들의 “서로 다른 휘포스타시스(위격)”라는 주장은 마치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두 명의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오해는 결국 양측의 언어가 다르고 사용하는 의미도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오해를 해소하기 위한 노력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362년 알렉산드리아 공의회였다. 361년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사망하고 부황제였던 율리아누스가 황제에 오르면서 이교 제의가 부활함과 동시에 교회에 대한 의도적인 배제가 시작되었다. 내적으로 분열되어 있던 교회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신학적 일치를 모색하게 되었다.

 ‘안디옥인들에게 보내는 공의회 결정에 관한 서신’을 살펴보면 알렉산드리아 공의회는 체자레아의 대 바질리우스를 중심으로 한 갑바도키아의 세 교부들이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온 신학적 중재 방법을 제시하였다. 이 편지는 당시 성령대항론자들을 대항하여 ‘성령의 신성’을 강조했고, ‘휘포스타시스’에 관한 양측의 서로 다른 이해를 처음으로 제시함으로써 양측의 신앙고백이 얼마든지 일치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알렉산드리아 공의회의 신학적 결론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381년)에서 ‘삼위일체논쟁의 종결’로 열매 맺게 된다.

김형건 목사(CAM대학선교부장)

 

기사입력 : 2020.01.12. am 11:29 (입력)
김형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