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기획ㆍ특집 > 기획특집
3.1운동 100년, 그리고 한국교회의 나아갈 길 ⑦ - 마지막회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일제의 강점 아래서 민족의 독립과 자결을 외치며 분연히 일어났던 3.1운동은 전 세계에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의 당위성과 의지를 널리 알렸습니다. 그 중심에 기독교가 있었습니다. 순복음가족신문은 3.1운동 100주년의 해를 맞아 1월 20일자 신문부터 7회에 걸쳐 3.1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기독교의 역할을 되새기고, 기독교가 주도한 3.1운동의 정신을 향후 교회가 어떻게 계승하고 통일시대를 대비하며 국가와 민족을 이끌어 가야 할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글은 한국교회사의 최고 권위자인 민경배 백석대 석좌교수가 집필합니다.<편집자 주>

역사를 보아야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된다
구한말 한국교회의 역사적 예언자적 기록
“3.1독립운동의 현장 증언과 보존”의 핵심



역사의 보존

어떤 역사적 사건이든지 그것은 기록되고 보존되어야만 사실로 남는다. 가령 참혹한 6.25 한국전쟁의 흔적이 서울에는 하나도 눈에 뜨이지 않는다. 6.25의 참혹한 실상이 사라진 것과 다름이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나타나는 곳이 역사라는 사실이다. 출애굽기 10장 2절은 역사를 보아야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3.1독립운동 당시의 역사 보존문제

3.1독립운동 당시에는 보도관제가 극심해 일본  동경에서도 3월 7일이 되서야 3.1운동 발생 내용이 ‘아사히신문’에 보도 되었을 정도였다. 한국에는 언론 자체가 없었다. 따라서 3.1독립운동의 사상자와 파괴된 건물의 통계를 알려주는 곳이 어디에도 없었다. 한국교회 주간신문이나 선교사 잡지는 1년이 지나도록 일언반구 언급을 할 수 없었다.
 그 당시로서는 다만 조선총독부 시정연감이나 군경의 공식적인 기록밖에 없었다.
 그런데 독립운동 전개나 그 주체 그리고 회수, 피해, 참살의 통계나 기록을 남긴 사람들이 있다. 외국에서의 일이다. 김병조 목사와 박은식인데, 김병조는 ‘3.1독립선언서’ 서명자 33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동했으며 1920년 6월에 ‘한국독립운동사략’을 써냈다. 하지만 지방의 원근 관계나 시세가 복잡해 그 서술이나 통계에 착오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다.
 ‘황성신문’ 주간이었던 역사학자 박은식은 같은 해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간행한다. 3.1운동의 태동과 전개, 일제 군경의 탄압과 만행, 지역별 각종 통계, 여러 지역에서의 일제 만행과 참상에 대한 기사와 도표들을 싣는다. 하지만 비분강개로 일관한 점도 눈에 띈다. 피해 통계의 과장 가능성을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 주간지 ‘기독신보’는 어떠하였는가. 당시 그 신문에는 3.1운동에 대한 기사가 하나도 없었다. 다만 3월 19일자 ‘장로회 통신란’에 “각 지방 ‘분요’ 때문에 강대가 빈 곳이 많다”는 기사뿐이다. 그러다가 1920년 2월 25일에 가서야 ‘오찬일의 출감’이란 기사가 뜬다. “작년 3월 독립운동 관계로 입감하였다가 출감하였다”는 기사다. 그리고 그해 3월 31일자부터는 ‘손병희 예심’에 관한 기사를 연재한다. ‘내란이 아니고 조선독립을 목적한 중심인물’들이 기독교인 23명, 천도교인 16명, 기타 7명 등 합 46명의 공판 기록이라 해서 연재하기 시작한다. 만세운동 1년이 넘어서이지만 대단한 기사다.
 

한국교회의 역사 보존동력, 현장 고발

 그런데 정확하고 대담한 자료가 발견되는 곳이 있다. 곧 1919년과 1920년 장로교회 총회의 회의록과 부록으로 실린 각 노회 상황보고서이다. 여기에는 현장의 실존적인 증언과 목격이 숨 쉬고 있다.
 1919년 총회록에 대담한 글이 실린다. 그 서문에 당시 총회장이던 김선두 목사가 ‘본년 3월 1일에 조선독립운동 사건으로 경성 서대문 감옥에 수감 되어 본회로 보낸 편지를 서기가 낭독함에 회중이 슬픈 마음으로 받고 회장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한 일’이란 글이다. 이것은 교회가 공식적으로 3.1독립운동을 ‘독립운동’이라고 공문화한 문서로 기념돼야 할 귀중한 자료이다.
 당시에는 ‘독립’이란 글을 쓸 수 없었다. 폭동 봉기 소요 불온 시위 이런 말들만 쓰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교회는 ‘독립’이란 글을 대놓고 계속 보란 듯 연방 쓰고 있었다.
 3.1독립운동의 전국적인 파급, 동원 인원, 피해 규모 등에 대하여 당시 현장에서 기록 보존 고발 역할을 다한 것이 교회밖에 없었다. 총회나 연회 각 노회의 상황보고가 그런 것들이다. 한국교회 위대성이 눈부시다. 노회들 전부가 ‘조선독립만세사건’에 대한 현장 피해 통계를 일일이 기록 보고 공개한다. 가령 ‘교인들 중 복역, 태형, 수감, 공소무죄방면, 악형 받은 자, 수삭 악형에 무죄방면, 구타 받은 자, 총 맞은 자, 부상자, 사망자, 처역된 자, 미결수, 악형으로 사망한 자, 총살된 자, 포살된 자, 훼파된 교회, 불탄 교회, 병화로 예배드리지 못한 교회’  이런 식으로 그 명단과 숫자가 정확하게 보고 기록돼 있다.
 이에 의하면 장로교만의 총사상자가 2560명인데 전체 사망자 7500명의 34.1%다. 교회의 역사보존 의지와 그 실행은 한국교회의 드높은 기념탑으로 길이 빛나고 있다.  


한국교회의 예언자적 역할

당시 3.1운동에 대한 보도나 피해 상황에 대해 이처럼 대대적으로 공개를 하고 ‘독립’이란 글을 계속 쓴 곳은 교회가 유일하였다. 교회가 독립운동 현장의 목격 증언 보존이란 예언자적 역할을 다 해낸 것이다. 각 교회의 당회록, 시찰회록, 노회록, 총회록, 년회록에 3.1운동의 역사적 기록들이 자세하게 적혀 보존되고 있다. 이런 공개보고 기록 보존은 교회가 폭악과 잔학, 살상, 그런 죄악을 현장 고발 증언하는 예언자적 사명 수행자임을 입증한 것이다.
 1919년 미국에 체류하던 신흥우가 영문판 ‘한국의 재생’, 정한경이 ‘한국문제’를 간행한다. 자료집이라기보다는 한국 미래에 대한 꿈을 그린다.
 미국 NCC 동양문제위원회는 ‘한국사정’이란 자료집을 편집 간행한다. 당시 재한 선교사들은 일본 헌병의 엄격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헌신적으로 피해현장을 답사하고 사진을 찍고 자료를 묶어 미국에 탁송했다. 3.1운동의 실상과 일경의 가혹한 탄압들을 사진으로 찍고 피해자들의 증언들을 모아서 이를 미국에 발송했다. 이를 통해 한국에서 발행할 수 없었던 귀중한 현장 자료들이 묶여 책으로 간행됐다.
 교회가 3.1독립운동의 현장 증언, 보존의 역할을 해낸 것이다. 이는 우리 한국교회의 거대 기념탑이다.

민경배(백석대학교 석좌교수)

 

기사입력 : 2019.03.03. am 11:57 (편집)
복순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