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기획ㆍ특집 > 김지방 기자의 ‘사랑, 세상을 변화시키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진행된 프랑스의 과거청산

사랑과 희생 없이 진정한 정의는 오지 않는다

이 사진은 1944년 나치 독일을 물리친 프랑스 사람들이 한 여자를 삭발하는 장면입니다. 이 여성은 머리를 깎이고 옷을 찢긴 채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끌려 다닌 뒤 공개재판을 통해 처벌을 받았습니다.

 프랑스는 나치에 조금이라도 협력한 이들은 철저히 심판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1944년 6월 6일) 이후 그 해 11월까지 약 6개월 동안 프랑스에서 나치 부역자로 판결 받아 사형 당한 이들만 1만822명에 이릅니다.

 과거청산은 프랑스 사회 곳곳에서 벌어졌습니다. 학자 문필가 종교인 나치협력자 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사람들이 재판정에 불려갔습니다. 동네마다 즉석재판이 열려 부역자로 지목받은 이들을 나무에 묶어 처형하거나 사진처럼 여성을 조리돌림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알베르 카뮈가 이런 과거 청산에 앞장섰습니다. 그는 독일에 맞서 레지스탕스에 가담해 프랑스 국민의 마음을 울리는 글을 쓴 작가였습니다. 카뮈는 “누가 감히 용서를 말할 수 있겠는가? 칼은 칼로만 이길 수 있다”(1944년 8월 30일 콩바 사설)며 조국을 배반한 이들을 과감하게 처단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카뮈를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공개적으로 반박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언론인이었던 프랑수아 모리악입니다.

 “연합군의 승리는 민주국가들이 히틀러로부터 거둔 인권의 승리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인간이 하나님의 자손임을 믿는다. 비록 죄인이라도 모욕 받지 않고 차분하게 재판을 받고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1944년 9월 8일 르피가로 사설).

 모리악은 과거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증오와 폭력이 확산되는 것을 우려했지만, 카뮈는 모리악과 교회를 뼈아프게 비판하면서 과거청산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전쟁으로 국민이 고통을 받을 때 영적 지도자들은 침묵했다. 이는 교회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보여주는 증거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숙청하자는 게 아니라 제대로 숙청하자는 것이다”(1944년 9월 16일 콩바 사설).

 레지스탕스 작가 카뮈와 기독교 언론인 모리악 사이의 논쟁은 1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카뮈는 “게임이 시작됐으니 끝을 봐야 한다”면서 “우리는 불의보다 무질서를 택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과거청산 재판을 통해 프랑스의 작가들도 처벌을 받았습니다. 숙청 대상 프랑스 작가의 명단은 처음 12명이었지만 나중엔 128명까지 늘어났습니다. 단지 레지스탕스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사형 판결을 받은 이도 있었고, 모리악과 카뮈가 함께 사면을 요청했던 젊은 작가가 끝내 사형 당하기도 했습니다. 겉으로는 독일에 협력했지만 몰래 레지스탕스 작가들을 숨기고 보호했던 언론인은 자살했습니다.

 사태가 이렇게 전개되자 카뮈는 1945년 8월 30일, 자신이 강력한 숙청을 주장했던 때로부터 정확히 1년 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프랑스에서 과거청산(숙청)은 실패했다. 이는 추악한 단어가 되고 말았다.” 9년 뒤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가 독립을 요구하자 프랑스는 무력으로 철저하게 진압했습니다. 포로를 고문하고 민간인을 상대로 군인들이 테러를 저질렀습니다. 전 세계가 프랑스의 폭력을 비난했습니다.

 전쟁의 참혹함을 어느 나라보다 잘 알고 있었던 프랑스, 과거청산을 엄격하게 실행한 프랑스가 왜 알제리를 잔인하게 짓밟았을까요? 프랑스의 역사가 앙리 루소는 “프랑스의 과거청산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프랑스 민족과 레지스탕스 정권을 위한 숙청이었다”며 “그렇기 때문에 프랑스 지배에 반발한 알제리에 그토록 잔혹했던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나를 희생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처럼….

김지방(국민일보 기자)

 

기사입력 : 2019.02.10. am 10:31 (입력)
김용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