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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의 라푼젤 ‘빅토리아 몬테네그로’

부모의 원수를
아빠라고 부르며 자란
나는 누구인가,
내가 살아온 인생은
모두 거짓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리의 인생에 필요한 것은 사랑.

 라푼젤 이야기 아시죠? 어린 시절 마녀에게 납치된 여자아이가 높은 성에서 탈출해 엄마아빠를 찾는 동화입니다. 아르헨티나에는 진짜 라푼젤이 있습니다. 빅토리아 몬테네그로라는 여성이 그 주인공입니다. 빅토리아의 어릴 적 이름은 마리아였습니다. 아버지 테츨라프는 유명한 군인이었지요. 테츨라프 장군은 늘 딸에게 자신이 하는 일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빠는 오늘도 조국을 어지럽히는 빨갱이들을 잡아들여 나라를 구했단다. 아르헨티나는 지금 전쟁을 하는 중이야. 나라를 살리는 전쟁이지.”

 마리아는 그런 아버지를 존경했습니다. 마리아가 16살이던 1992년 어느 날 경찰이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어린이 납치 혐의로 체포한다”며 아버지를 붙잡아갔습니다. 아버지가 납치한 어린이가 바로 마리아였습니다. 테츨라프 장군은 마리아의 진짜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마리아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분명 경찰이 거짓말을 하는 거야!”

 유전자 감식 결과 그녀의 진짜 아빠는 로케 몬테네그로, 엄마 이름은 일다 몬테네그로였습니다. 로케와 일다 부부는 1976년 딸을 낳은 직후 군인들에게 납치돼 실종됐습니다. 마리아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진실은 무엇일까. 감옥에 갇힌 ‘아버지’ 테츨라프를 찾아갔습니다.

 “미안하다, 마리아야. 군인들이 쿠데타로 집권한 1976년, 내가 소장으로 있던 비밀감옥에 젊은 부부가 끌려왔지. 그들이 바로 일다와 로케였다. 나는 일다와 로케가 비밀감옥에 수감되기 직전에 아기를 낳은 사실을 알았어. 태어난 지 넉 달이 된 너를 내가 데려와 길렀단다.”

 테츨라프는 재판에서 1970년대에 군인들이 정권에 반대하는 젊은이들을 납치하고 그들의 아기를 빼앗아 강제로 군인과 경찰들에게 입양시키는 일을 수없이 저질렀다고 증언했습니다. 마리아는 바로 자신의 아빠와 엄마를 빼앗은 군인을 아빠라고 부르며 자란 거죠.

 마리아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부모의 원수를 아빠라고 부르며 자란 나는 누구인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인생은 모두 거짓인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마리아는 때로는 몸속의 피를 다 뽑아내서라도 진실을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습니다.

 빅토리아는 엄마아빠의 고향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 비록 엄마와 아빠는 없었지만, 할머니가 살아 있고 엄마와 아빠를 기억하는 이웃들이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잃어버린 아들과 며느리를 다시 찾은 듯 마리아를 반겨주었습니다. 사진 속 엄마의 얼굴은 한눈에 봐도 자신과 꼭 닮았습니다. 마리아의 진짜 이름은 빅토리아라고 했습니다. 이웃들은 마리아에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고, 팔을 벌려 안아주며 식사에 초대해 아빠와 엄마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래도 마리아는 옛 아버지 테츨라프를 미워할 수 없었습니다. 매주 교도소를 찾아가 당뇨병에 걸린 테츨라프를 간호했습니다. 2003년 테츨라프는 감옥에서 숨을 거두며 그녀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진짜 이름, 빅토리아 몬테네그로를 자신의 이름으로 받아들인 것은 2010년이었습니다. 진실을 안 뒤에도 자신을 인정하고 이름을 되찾는 데 무려 20년이 걸린 셈입니다. 이름을 바꾸는 것만으로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데 여러 해가 걸렸듯이, 군인의 딸이었던 마리아가 진짜 빅토리아가 되기까지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2011년 12월의 마지막 날 빅토리아는 군인병원에서 테츨라프의 아내, 빅토리아가 엄마라고 불렀던 여인을 품에 안고 있었습니다. 서서히 숨을 거두는 ‘엄마’를 보며 빅토리아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지금 여기서 당신을 간호하고 있어요. 내 진짜 엄마가 돌아가실 때에는 옆에 있어 주지도 못 하고 한번 안아주지도 못 했는데.’

 빅토리아의  뺨에 흐르는 눈물은 어느 엄마를 추모하는 것인지, 빅토리아도 알 수 없었습니다. 2012년 빅토리아의 진짜 아빠 로케 몬테네그로의 유골이 발견됐습니다.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과거청산을 어디까지 하고 누구를 처벌해야 하는지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갈라져 싸우고 미워했습니다. 빅토리아가 겪은 혼란과 고통을 아르헨티나 사회가 똑같이 겪었습니다.

 빅토리아는 조국이 증오와 다툼에서 벗어나길 기도했습니다. 거짓을 밝혀내고 진실을 찾아내되, 미워하고 분노하기보다는 함께 손을 잡고 사랑과 용서, 화해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길 기도했습니다. 진짜 아빠와 엄마도 그리웠지만, 테츨라프와 그 부인도 미워할 수 없었던 빅토리아의 마음처럼 말입니다.

 아빠와 엄마가 진정으로 원한 것도 바로 그것이라고 빅토리아는 생각했습니다. 빅토리아는 아빠 엄마의 옛 동료들과 함께 정치에 뛰어들었습니다. 빅토리아 몬테네그로는 2017년 12월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의원에 당선이 되었습니다.

 진실을 밝혀내는 것보다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더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쉽게 비난하고 미워하기보다는 설득하고 인내하며 기다려주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아르헨티나뿐만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김지방 기자<국민일보>

 

기사입력 : 2018.08.12. pm 13:35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