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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대하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에 수용됐던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은 훗날 그 당시를 기억하며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썼다. 그는 참혹한 수용소에서도 한 줄기 희망의 빛을 갈구했던 사람들은 매일같이 유리 조각으로라도 면도를 했다고 말했다. 그것 때문에 마지막 남은 빵을 포기해야 할지라도 품위를 유지하려 했으며 혈색이 좋아 보이게 하기 위해 뺨을 문질렀다는 것이다. 수용소에서 프랭클이 발견한 것은 희망을 상실하면 삶을 향한 의지마저 상실한다는 점이었다.

 ‘희망의 신학’을 주창한 독일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 박사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 수많은 죽음을 경험하며 희망이 죽음마저 뛰어 넘게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희망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강조했다.

 우린 지금 희망이 상실된 시대, 절망이 온 사회에 만연되어 있으며 믿음이 소유로 대체된 시대에 살고 있다. 모두가 아파해 하는 이 시대에 다시 희망을 이야기해야 한다. 희망은 청하지도 않는데 저절로 오는 손님이 아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희망을 만들어야 한다. 죽음보다 강한 희망을 던지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것을 희망의 주체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건다는 뜻이다. 그러할 때에 우리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 더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땅의 문제만 바라볼 때에 절망한다. 지금 우리가 믿었던 많은 것들이 우리를 절망케 한다. 그러나 고개 들어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 볼 때에 희망을 갖게 된다. 날마다 고개를 높이 들어 하늘에 속한 것들을 바라보는 것이 희망을 던지는 사람들의 자세다. 그 희망의 습관을 길러야 한다.

 긴 세월 동안 한국 교회는 세상의 희망이었다. 지금 잠시 기진해 있지만 ‘교회가 세상의 소망’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교회의 머리되시는 주님께서 여전히 이 땅의 희망이시기 때문이다. 모두가 절망하는 지금이야말로 교회가 다시 죽음보다 강한 희망을 이야기 할 절호의 순간이다.


이태형(기록문화연구소 소장)

 

기사입력 : 2017.01.08. am 10:29 (입력)
이태영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