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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수 장로(여의도순복음교회)

구한말 한국 초대교회 이경직 목사의 삶과 믿음 

 아펜젤러 애제자로 정동제일교회 등에서 사역 
 이승만 대통령과 절친한 사이로 망명 돕기도
 목사, 장로, 교수,대법관 등 믿음의 가문 이뤄  
            

 때는 어수선한 구한말, 서울 안국동 전주 이씨 효령대군의 16대 손인 이운붕의 집. 그 날 따라 온가족이 모여 차례로 절을 하며 제사를 드리고 있었다.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이라는 종 2품의 벼슬을 안고 있던 이운붕은 제사문제로 아들 이경직과 사이가 좋지 않자 이번에야말로 버릇을 고치겠다고 단단히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배재학당을 다니던 아들의 태도는 너무나도 강경했다.

 “뭐? 조상님 제사상에 절을 올리지 않겠다고? 이런 천하의 불효막심한 것을 보았나! 종아리 걷어!”

 결국 이운붕은 아들의 종아리가 피멍이 들도록 회초리로 내리쳤다. 시집 온 새색시는 신랑이 시어버지에게 맞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버선발만 동동 굴렀다. 전통 유교 가문인 집안에서 ‘예수쟁이’가 된 아들을 용납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개화기 시류를 좇아 막내아들만큼은 신식교육이 시키고자 배재학당에 보낸 것을 화근이었다.

 “당시 새색시였던 할머니 말씀으로는 증조할아버지가 할아버지를 배재학당에 넣을 것을 뼈아픈 실수라고 생각하셨답니다. 하지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 우리 할아버지가 예수님을 믿게 되신 것은 만세 전부터 예정된 은혜의 섭리였습니다. 할아버지를 통해 우리는 믿음의 가문이 되었으니까요”

 한국초대교회 목사이자 선교사였던 이경직 목사에 대해 친손자인 이용수 장로는 할아버지에 읽힌 일화 중 이 이야기가 가슴에 와닿는다고 설명했다. “집에서 쫓겨나고 친지들까지 내치는 상황에서 할아버지는 은사인 아펜젤러 선교사의 도움을 얻게 되죠. 결국 정식으로 신학공부를 하고 아펜젤러가 세운 정동제일교회에서 할아버지는 목회인생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용수 장로는 이경직 목사가 그 후 동대문교회와 종로중앙교회에서 시무하며 아호인 ‘석담’(石潭·돌 사이에 흐르는 맑은 물)처럼 거칠어진 민족의 역사 속에 희망의 물줄기가 되길 바라셨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동대문교회 사역 시절인 1905년, 노동이민자의 신분으로 가족을 데리고 하와이행 이민선에 올라 하와이 카우아이 섬 사탕수수밭에서 노예처럼 일하며 이민생활의 고달픔과 아픔에 눈물 흘리는 동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희망을 전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귀국 후 1911년에는 한국 최초의 대학교이며 신학교인 협성신학교(현 감신대)를 1회로 졸업하면서 목사안수를 받고 서강교회, 부평교회 북창동교회 등에서 담임목사로 활동했다.

 “할아버지는 참 과묵하고 성실하신 분이셨어요. 하신 일에 대해 어떠한 자랑도 없으셨죠. 배재학당을 함께 다녔던 이승만 박사와는 남다른 친분관계를 갖고 계셨고, 1912년 3월 이승만 박사가 한국 감리교 평신도 대표로 선임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셨죠. 결국 이승만 박사는 한국 대표로 미국 미니아폴리스에 가게 돼 미국 사회 안에서 민족 지지기반을 닦게 되죠. 그 일로 할아버지는 일제의 감시를 받게 됐구요”

 결국 이경직 목사는 일제 탄압을 피해 1917년 만주행을 결단하게 된다. 그리고 용정으로 건너가 일찍이 배운 한의술로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돌보면서 하나님 사랑과 동족에 대한 사랑을 몸소 실천했다. 아내인 이메레 여사는 남편을 도와 복음 전파에 힘써 ‘전도 부인’으로 유명해졌고 자택에서 시작된 교회는 만주 지역 선교에 큰 역할을 감당한 용정감리교회로 발전됐다.

 이용수 장로는 “개화기 초대교회 목사로 할아버지가 남긴 업적은 너무나도 컸지만 지금이 아니면 할아버지에 대한 얘기가 사라질까봐 염려됐다”고 했다. 그리고 1990년 후손들을 중심으로 전기사업회를 발족하고 성신여대 교수인 외조카 김용직 교수에게 집필을 맡겼다. 

 “하와이와 용정을 두루 다니며 자료를 수집하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결국 19년 만에 할아버지의 목회사역을 담은 ‘하와이에서 만주까지’(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를 완성하고 지난달 정동제일교회에서 할아버지 탄생 133주년 및 전기출판기념 예배를 드렸죠”

 이용수 장로는 출판 기념회를 계기로 100여 년 전 이경직 목사가 애독했던 성경과 한의서 등 유품 225점을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할아버지는 아펜젤러 선교사의 장례 예배 때 대표기도를 하실 정도로 애제자셨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님들에게 대한 유물이 전시돼 있는 곳에 할아버지의 유품이 함께 있다는 것은 참 의미있는 일이죠. 내년에 할아버지의 유품에 대한 전시회도 기획 중에 있어 한국 기독교인들이 신앙 유산의 의미와 사명에 대해 다시 생각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용수 장로는 “우리는 할아버지를 통해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어떠한 역경이 다가와도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다는 용기를 배웠다”며 믿음의 가정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을 이야기했다.

 이경직 목사의 가문은 4대에 걸쳐 240명의 후손을 뒀다. 이중 목회자가 8명이 배출 돼 세계 곳곳에서 복음 사역을 전개하고 있으며 장로가 9명이다. 현재 성신여대 사회과학대학장으로 있는 김용직 교수와 김상원(전 대법관) 변호사도 이경직 목사 가문의 일원이다.

 

 

기사입력 : 2009.12.27. am 11:28 (편집)
오정선기자 (jungsun5@fgtv.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