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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재 장로(진우엔지니어링·여의도순복음교회)

내 삶의 목표는 ‘착하고 충성된 종’
감사가 모든 문제 해결의 원동력
외국인 선교하며 많은 기적 체험

김학재 장로는 불가능과 역경을 손에 잡히는 축복으로 일군 믿음의 사람이다. 김 장로가 이끄는 진우엔지니어링은 전열기구 등을 국내 대기업에 납품하고 루마니아와 인도 등 해외에 수출하는 견실한 중소기업이며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축복의 통로이다.

김 장로에게 신앙을 물려주신 분은 어머니시다. 신앙인이셨던 어머니는 유교사상이 엄격한 집으로 시집을 와 모진 핍박을 받으면서도 교회에  다니셨다. 어린 시절 어머니 무릎을 베고 예배를 드리며 움튼 신앙이 그의 성장과 함께 자라나 김 장로의 평생을 지지해주고 이끌어주는 길잡이가 됐다. “어린 시절과 청소년시절이 험난했어요. 아버지가 가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할머니와 고모 손에서 자란 적도 있고요. 대학은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었는데 외할아버지께서 도와주셔서 진학할 수 있었죠” 하지만 1973년 대학 졸업을 앞두고 막막한 순간이 왔다. 오라는 곳도 할 일도 없이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72년 12월 24일 교회 식구들과 새벽송을 다녀온 후 집에 돌아왔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없을 만큼 마음이 뜨거워져서 교회에 갔다. “사람들 보기가 민망할 정도로 대성통곡을 하고 기도를 했어요. 성령침례를 받은거죠”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김 장로는 기도하며 하나님께 매달렸다.“제대한지 얼마 안됐고 제가 공부를 특별히 잘하지도 못했는데 기도만 하면 당시 우리나라에 200명 밖에 없는 전기기사 주임기술자 면허가 눈앞에 아른거렸어요” 보통 1년 이상 투자해서 시험 준비를 하는 어려운 시험이었다. 예행연습이라고 생각하고 시험 전날 딱 하루치기로 문제집만 한번 주욱 풀었다. 그런데 다음날 시험문제를 보니 어제 마지막에 본 문제들이 그대로 나왔다. 당당히 합격한 김 장로는 이를 기반으로 삼성, 대림, 대우 등 굴지의 대기업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매일 하나님과의 동행하며 자신감을 얻은 김 장로는 “하나님이 나의 삶을 관여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사업을 시작한다. 자본도 뛰어난 기술력도 없고 인맥과 영업능력도 없었지만 우연히 미국잡지를 보다 떠오른 전기온풍기에 대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1987년 창업에 나섰다. 첫번째 온풍기를 한일병원에서 구입해 갔는데 자꾸 고장이 났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전화번호를 바꾸고 사업체 이름을 바꾸면 모든게 간단해질 것 같았죠. 하지만 신앙인으로서 그럴수 없었어요. 나와의 싸움이라고 생각하고 매달렸죠” 끊임없이 매달린 결과 문제를 발견했고 이를 해결하니 이후 어떤 A/S 요청도 없었다. 문제를 해결한 김에 김 장로는 똑같은 온풍기를 한개를 더 만들어서 사당역에 갖다 놓고 사용하고 싶은 사람은 연락을 달라고 메모를 붙여놓았다. 3일후 지하철 설비부에서 사용을 해보니 좋다며 2개를 주문했다. 이어 20개, 50개, 200개 점점 주문량을 늘렸다. “빈집에 소가 들어온다는 말을 실감했어요. 나와의 싸움에서 이기니 원수가 소가 되어 온거죠” 마구 마구 쏟아지는 물량 주문에 은행돈 한푼 들이지 않고 당시 조성되고 있던 시화공단에 땅을 분양받아 공장을 지을 수 있었다. 중간에 공사를 맡아주던 친구가 병에 걸려 공사에 난항을 겪기도 했지만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린 결과 막대한 공사대금도 해결이 됐고 무엇보다 친구가 완쾌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1995년 5월 조용기 목사님을 모시고 준공식을 할 때는 정말 눈물이 많이 났어요. 제가 장손인데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제사를 추도예배로 바꾸고 절도 하지 않는 것을 친척들이 못마땅해 했거든요. 그랬던 친척들이 조용기 목사님을 보고서 드디어 변화 받고 예수님을 믿겠다고 교회에 다니겠다는 사람들이 생겼어요” 친척과 집안어른들의 비난과 꾸지람에 김 장로는 많은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기도로 억울함을 풀었다. 감사한 일들만 가득 생기자 김 장로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시화와 반월공단에서 근무하는 10만 외국인근로자들을 위한 예배처소 만들어주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다. 본교회에 요청을 해 2002년 외국인근로자 교구를 설립했다. 김 장로는 외국인 선교를 하며 신학공부를 더불어 시작했다. “공부를 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제 뒤에서 웃으시는게 느껴지는 것 같았어요” 2006년 본교회 외국어예배국에 흡수되기 전까지 외국인근로자교구에서는 나이지리아와 인도, 중국 등에서 온 400명이 예배를 드렸고 일반 봉사자와 신학생 전도사들이 힘을 합쳐 성도들을 섬겼다. “무엇보다 기적이 많이 일어났어요. 하루는 나이지리아에서 온 데이빗 형제가 식사기도를 오래 하면서 굵은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는거에요.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영문을 물으니 ‘장로님 나는 나이지리아를 떠나올 때부터 위와 장이 나빠 밥을 아주 조금 밖에 먹을 수 없었어요. 지난 예배 시간에 조용기 목사님 말씀을 듣는데 속이 이상해서 화장실로 달려갔는데 피덩어리를 토했어요. 이젠 여기서 죽는구나 이젠 일도 못하고 돌아가야하나보다 생각했는데 그 다음부터 더 힘이 나고 밥맛이 좋아졌어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는거에요. 그제야 밥그릇을 보니 밥이 얼마나 많이 담겨있던지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하는 마음에 저도 울고 말았죠” 김 장로는 지금도 그후 삶의 자세가 달라지고 기쁨이 넘치던 데이빗 형제의 표정을 잊지 못하고 있다. 

“지금도 감사가 뱃속부터 밀려와요. 이렇게 감사한데 뭘하지, 뭘해야하지 찾게 되죠” 그렇게 기도하다가 웬지 ‘저곳을 도와라, 저사람을 도와라’하는 것 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면 발이 먼저 달려가고 있다. 김 장로는 현재 장로전도단에서 봉사하고 있다. “한달에 한번 요청이 있는 교회에 가서 전도를 해요. 얼마전부터는 클라리넷을 배우고 있어요. 음악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기에 배우는게 하나도 힘들지 않네요” 뿌듯한 표정으로 김 장로는 “내 삶이 다하는 날 생명되신 하나님님 앞에 섰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말씀하실 수 있도록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것이 제 삶의 목표입니다”라고 말했다.
 

사진 : 김용두 기자

 

기사입력 : 2009.10.11. am 08:00 (편집)
복순희기자 (lamond@fgtv.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