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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수 장로 - (세브란스병원 소아과장·정동제일감리교회)

“예비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라크 등 의교선교에 앞장선 의사
영혼속에서 울려퍼지는 찬양에 감사

 1987년 미국 버펄로에 교환교수로 갔을 때다. 잘되던 실험이 일 년이 넘게 제자리걸음이었다. 너무나 힘들어 새벽예배에 나가고 금식도 했지만 실험은 전혀 진척을 보이지 않았다. 고통 가운데서 절망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김 교수에게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을 말씀하셨다. ‘동수야! 하박국 기자를 봐라. 먹을 것이 없고 아무 열매가 없어서 굶어 죽어도 감사하고 즐거워하지 않았니’ 김 교수는 그때 깨달았다. ‘주님 저도 논문 하나 못써도 하나님 한 분만으로 감사하고 즐거워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며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하나님의 기적은 그때 시작됐다.

 귀국 7개월을 남겨놓고 실험이 풀리기 시작한 것이다. 실험이 되어가다 보니 요로감염환자의 소변샘플이 필요했다. 하지만 샘플을 요청했을 때만 해도 많다고 큰소리치던 병원은 하루에 1개 또는 2개만 주는 것이다. 적어도 100개 이상이 있어야 실험을 할 수 있는데 말이다. 그렇다고 환자가 많아지길 기도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루는 지도교수가 5년 전 죽은 니턴 박사가 자신에게 냉동고를 기증했는데 김 교수에게 그 냉동고를 청소하라는 것이었다. 김 교수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알겠다고 말하며 알지도 못하는 어느 학자의 냉동고의 문을 열고 청소를 시작하려는데, 그 안에 샘플이 있었다. 그는 내용을 확인하고서는 그 자리에서 무릎 꿇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요로감염환자 샘플이 1000개 정도가 잘 보관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분이 누구를 위해 평생 그 샘플을 모았겠습니까? 저와 한 번도 만난 적도 없는 분이잖아요.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준비하신 것 아닙니까? 야훼 이레의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분이세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요”
 그래서 김 교수는 4개의 논문을 쓰고 귀국했다.

 김동수 교수는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가족 중 아무도 교회에 다니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교회에 나갔다. 어렸지만 믿음생활에 열심이었다. 그 이유는 동네 근처 중랑천에서 놀다 물에 빠진 후로 불을 끄면 죽을 것 같은 공포감이 생겼는데 교회를 다닌 후부터 사라졌기 때문이다. 김 교수 혼자서 믿음 생활을 하는 것을 집안에서 뭐라고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동네 부흥회만 있다면 밤이고 낮이고 찾아다닐 수 있었다.

 하지만 중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게 된 것이다. 그의 집에서는 아버지의 죽음이 한 집에서 두 개의 신을 모셔서 일어난 일이라며 앞으로 교회에 나가지 말라는 ‘금족령’을 김 교수에게 내렸다. 하지만 그는 교회를 못 다녔어도 숭실중학교를 다니며 예배를 드릴 수 있었고 배재고등학교, 연세대학교 모두가 미션스쿨이라 예배는 드릴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하지만 인턴, 레지던트를 거치면서 신앙인의 기본도 지키기 힘들었다. 그의 아내가 임신 초기였을 때 세브란스병원 전공의사 4명 중 한 명으로 군산에 파견된 적이 있다.
 “아내는 3대째 크리스천 집안의 맏딸이어서 믿음이 좋았어요. 하지만 저는 군산에 내려가서는 다른 의사들과 함께 주말만 되면 산을 찾았죠. 산에 절이 얼마나 많습니까? 절에 자꾸 가다 보니 장난기가 생기더군요. 그래서 대웅전에서 ‘맏아들을 주십시오’라고 불공을 드렸지요”

 그 후로 아내에게 이상이 생겼다. 조기임신중독증에 걸린 것이다. 고혈압과 부종이 너무나 심했다. 그래서 임신 8개월이 되었을 때 조기출산을 했고 그때 태어난 딸은 신생아 호흡곤란증후군에 심각한 황달기가 심했다. 빨리 치료하지 않으면 저능아가 될 가능성도 높았다.
 “입원실에 가니 아내가 안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혈압으로 인한 망막박리로 앞이 안 보인다는 것이었죠. 안대를 한 아내가 아이는 괜찮냐고 묻는데 할 말이 없더라고요”

 김 교수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절을 찾아 우상에게 절했던 죄를 회개했다. 아이가 미숙아가 되더라도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3개월이 지나서 아내와 딸 모두가 퇴원할 수 있었다. 그 딸은 건강하게 자라 지금 의대를 다니는 예비의사가 됐다.

 김 교수는 마틴 로이드 존슨 목사를 가장 존경한다고 말했다. “남 웨일즈 카디프 출신의 전도유망한 젊은 내과의사였던 존슨 목사님은  스물일곱 살의 나이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목회를 시작했어요. 인술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복음’을 처방전으로 들고 나선 인물이지요. 전 저의 손이 예수님의 손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제가 하나님의 통로가 되어 환자들을 고쳐달라요”
 하루는 폐렴 걸린 한 아이가 너무나 열이 안 떨어지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간호하고 있었는데 김 교수가 할머니에게 교회 다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순복음교회를 다닌다고 하더군요. 제가 ‘할머니, 기도하면 낫는데 왜 손자에게 기도 안하세요?’라고 말했더니 제게 기도해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손을 얹고 간절히 기도했어요. 그랬더니 열이 금방 떨어지고 다음날 퇴원을 한 적이 있어요”

 김 교수에게 이런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환자들이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 앞에서 더욱 낮아지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마제리샤리프 및 발크), 이라크 바그다드 전후 지역, 인도네시아 반다아체 쓰나미 피해지역 등 의료선교봉사를 다녀왔다.
 “전쟁터에서 헬리콥터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데 어제 나갔던 6명이 다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누가 그런 봉사를 하고 싶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이 가라고 명령하시면 가야 되잖아요. 아침에 깨어서 기도하면 영혼 속에서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이라는 찬양이 흐르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는 하나님 복의 통로가 되고 싶다고 했다. 자신의 순종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고 고백하며 웃는 김 교수의 미소가 예수님을 무척 닮은 것 같다.


글·이소흔 / 사진·정승환 기자

 

기사입력 : 2008.10.17. pm 18:42 (편집)
이소흔기자 (sohuny@fgtv.com)